강정마을, 감정의 골만 깊어지네 (한겨레21, 20070703)
12월, 외할아버지의 부음을 듣곤 난 지하철과 비행기, 버스와 택시를 차례대로 갈아타며 서귀포의료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연세에 따른 퇴행성 질환을 제외한다면 늘 건강하셨던 외할아버지. 급작스런 죽음이 전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듯, 외할아버지의 영전으로 달려가는 길 위에선 꽤 까마득한 시간이 걸렸다. 늦은 밤 중에 도착한 그곳, 외할머니께서 손수 준비해두신 두건과 상복으로 채비한 뒤 두 번 반의 절을 올리고서야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얼굴에 와닿았다.
내려오느라 고생했다는 외할머니의 이야기는 가장 늦게 달려온 외손자의 끼니 걱정으로 이어졌다. 이모를 따라 식당으로 옮겨가 몇 가지 음식을 챙겨먹었다. 큰외숙부는 며칠 고생하자며 담배 두 갑을 쥐어주셨고, 작은외숙부는 술 한잔을 따라주셨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찾아올 조문객 맞이를 걱정하며...
다음날, 본격적으로 조문객 내방을 맞아 내가 담당한 곳은 식당이었다. 아직 어린애로만 알았던 사촌동생들과 함께 조문객들의 자리마다 음식을 날랐다. 19년을 제주도에서 살았음에도 상가를 갈 일이 거의 없던 나로서는 조문객들에게 국수를 대접하는 풍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한라산 남쪽, 특히 서귀포 지역에선 조문객 대접을 국수로 한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국수만이 아니었다. 상주들 모두에게 부조를 하는 겹부조의 풍습도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장자나 아들이 아니더라도 망자의 자식은 모두 상주가 되는 시대, 조문을 위해 몇 개의 부조봉투를 준비해야 하는 게 낭비처럼 느껴졌다. 제주의 겹부조 풍습은 생활개선 캠페인을 통해 상당부분 개선됐지만, 아직 한라산 남쪽에선 가까운 친척들 사이에 겹부조 풍습이 남아있다.
좋든 싫든 풍습도 시간의 흐름에 의해 형성되고 사라지는 사회적 습관이니 그 어떤 캠페인인들 일거에 그 습속을 없애기는 힘들 것이다. 겹부조에 대한 부정적 첫인상은 그 시작점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척박한 옛날에도 겹부조의 풍습은 존재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한라산 이남 지역을 포함한 제주도 전체가 넉넉한 동네라고 할 수는 없다. 돌려 생각해보니 겹부조에는 상호부조의 연대감과 친족, 마을의 공동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에 따른 서열도, 남녀의 차별도 겹부조에선 찾아볼 수 없다. 척박한 땅과 거센 바다만이 경제활동의 전부였던 곳에서, 관혼상제의 큰 일이 어찌 장자와 남자만의 일이었겠는가.
큰외숙부도 아닌 큰외숙모가 외할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운구차에 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며느리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아들이 영정을 든다고 한다. 서귀포의료원을 출발한 운구차량은 서귀포 서쪽 들입구를 빠져나와 법환마을과 강정마을, 월평마을을 차례대로 거쳐 중문 외갓집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그리고 이내 화장터로 출발했다.
해군기지 유치 문제로 시끄러운 강정마을 뉴스를 접하니 외할아버지의 뒤안길이 떠올랐다.
한 다리 건너면 궨당('친척'의 제주어)이 아닌 사람이 없는 제주도의 시골마을에 던져진 국가적 프로젝트는 그 오랜 공동체성의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평화의섬 제주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의 섬 제주도에 대양해군으로 나아갈 신형 이지스함이 들어설 해군기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지켜야 할 평화인가 만들어야 할 평화인가. 작고 힘없는 마을을 짓밟고 들어설 평화는 그 진정성에 치명적인 결함을 안을 수밖에 없다.
아직도 조문객에게 국수를 대접하고, 애경사마다 겹부조를 준비할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