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읽고느끼고'에 해당되는 글 70건

  1. 2004.12.15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 - 1981 by 망명객
  2. 2004.12.13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by 망명객
  3. 2004.12.07 시사와 역사 by 망명객
  4. 2004.12.05 영 아담 by 망명객
  5. 2004.12.03 책문 by 망명객
  6. 2004.12.03 극단의 시대 by 망명객
  7. 2004.12.01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by 망명객
  8. 2004.10.22 소설 속의 청년 읽기... by 망명객
  9. 2004.09.27 [책] 사회주의 by 망명객
  10. 2004.09.27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by 망명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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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시험 준비로 학교에서 밤을 지새고 피곤한 몸으로 반 졸면서 본 영화.

1981년 작품답게 조금은 촌스러운 오프닝.
007 못지 않게 너무나 강한 주인공 장폴 벨몽드.

압권은 영화음악.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
어째 시작 부분에서는 영화와 음악의 괴리감이 느껴졌는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

원제는 'Le Professionnel'.
내용은 기관에 의해 배신당한 요원의 복수극.

조직에 비해 무력한 개인이라 생각했는데 잘 키운 요원 하나가 마음 속에 품은 비수는 살 떨리도록 예리했다.

그의 죽음은 자살일까? 아니면 타살일까?
그는 오히려 타살을 가장한 자살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모든게 그의 계획대로 이루어졌고 그는 그럴 능력을 지녔으니까.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는 내게 자신을 파멸시키며 이루어낸 복수극은 더욱더 내 자신을 초라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빌어먹을~

그는 행복했을까?
세상사 다 자기의 계획대로 맞아 떨어지니 그랬을까?
어느 연약한 짐승이라니 그는 절대 연약하지 않다.
그를 사랑하는 주변인들이 있었고, 일대 몇을 상대해도 이겨낼 능력을 지녔는데 그를 어느 연약한 짐승이라 말 하는 건 과장 섞인 시적 표현이리라.

타살을 가장한 자살.
능력이 너무 뛰어난 이도 세상 살기 귀찮을 때가 있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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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쓸 수 없는 조제를 그녀의 할머니는 쓸모 없는 물건이라 부른다. 늘 방구석에서 독서와 요리로 소일하는 그녀의 유일한 낙은 유모차에 실려 세상구경 하는 것. 그녀는 그렇게 수동적 존재로 할머니의 쓸모 없는 물건일 뿐이다.

우연한 칼부림과 아침 한끼로 조제에게 빠진 그. 그는 조제를 사랑한다. 그러나 조제는 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 그녀는 쓸모 없는 물건이기에...

조제에게 유일한 사회적 관계였던 할머니의 죽음 이후 조제는 외롭다. 그 외로움의 바닥은 쓸모 없는 물건이던 조제의 손을 움직여 그의 어깨를 덮게 한다. 그리고 이제 조제는 무서워하던 호랑이를 보러가도 무섭지 않다. 조제의 옆에는 그녀가 뻗은 손을 잡아준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 여기까지는 종두와 공주의 오아시스처럼 지독히 절망적인 희망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제는 생각한다. 바다 속 물고기들처럼 어울려 사는 것도 좋지만 언젠가 자신의 곁에 있는 이가 떠나면 다시 혼자여야 한다는 것을, 떼굴떼굴 굴러가는 바다 속 조개 껍데기처럼 혼자여야 한다는 것을...


그는 조제를 떠난다. 도망자의 눈물을 보이며 그는 떠났다.

이제 조제는 더 이상 유모차를 타지 않는다. 부서진 유모차, 그것은 누군가가 끌어줘야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원동휠체어를 타고 대낮의 세상 속을 돌아다닌다. 그간 준비해온 혼자 살아가는 방법으로 혼자만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며...

오아시스의 공주가 불편한 몸으로 방바닥을 쓸고있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이건 절망 속 희망이라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희망 속 절망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조제는 혼자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결국 그를 그리워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는 조제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친구라고 이야기했다. 그도 가슴속에 조제를 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조제를 보며 내 주변의 구직자 친구들을 떠올렸다. 소속감이 없는 실체, 경제 활동인구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의 한숨으로 벌레가 되어간다는 친구들, 그들에게 아니 정확히는 우리에게 조제가 던지는 이야기는 희망이다.

그러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는 공지영의 이야기처럼, 각자는 외롭다. 누군가 끌어주는 유모차는 누군가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만 전동휠체어는 더 이상 누군가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존재는 외롭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조제는 외로운 존재로 혼자만의 밥상을 차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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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밝고 시사에 어두운 사람은 허화하다.
시사에 밝고 역사에 어두운 사람은 경박하다.

결국 날카로움과 함께 무거움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에게 인문사회과학이 필요한 것은 바로 날카로움과 함께 무거움을 바탕으로 한 사고의 넓이와 깊이의 확장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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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님의 블로그를 들렀다가 잠시...
Posted by 망명객

영 아담

보고읽고느끼고 : 2004. 12. 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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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토요일 아침, 하루를 열심히 살아보고자 아침 일찍 일어나 조조영화를 보러 간다.

초겨울의 비 날씨라 마음이 어두워지는데도 부러 밝은 영화는 보기 싫었다.
그래서 고른 영화가 'Young Adam'.
그리 밝은 영화처럼 보이지도 않고 주인공이 '이완 맥그리거'라니 별 고민 없이 간만의 조조영화를 즐기려했지.

예전 책으로 읽었는지 영화로 봤는지 아무튼 한국의 아담이 떠올랐다.
'아담이 눈 뜰 때'
그래, 장정일의 소설이었다.
영화로는 최재성이 주연이었고... 감독은?

뭉크의 사춘기 화집을 갖고 싶어했고 타자기를 갖고 싶어한 소년의 성장 소설이었던가...

그래, 한국의 아담은 이제 사그라든 기억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단지 어린 시절 한동안 손에 들려있던 두꺼운 성경의 창세기에 존재하던 아담만이 기억에 또렷할 뿐.

이제 영국의 아담 이야기인가?
글쎄, 영화 스토리 짜임새는 꽤 재미있었다.
그러나 극장 문을 나서면서 드는 느낌은 허무의 느낌, 바로 그것 뿐.
연민으로부터의 허무일 것이다.

영국의 아담과 그 곁을 스쳐가는 네 여인.
그냥 쉽게 '변태 이야기였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5% 부족한 무엇인가 있다.

욕망일까?
백수 이야기?
결백한 사람이 살인자로 낙인찍히는 부조리 고발?

그냥 그렇게 영국의 젊은 아담은 스토리를 남기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내게는 검은 구름과 겨울비와 사운드트랙에 대한 궁금함 그리고 까마득한 우울함을 남겼다.

토요일 아침.
그렇게 하루종일 토요일이 조용히 지나가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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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보고읽고느끼고 : 2004. 12. 3. 10:52
『책문』(김태완, 소나무, 2004)

책의 부제가 상당히 선언적이다.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요즘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꼭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TV 책을 말하다' 정도...

TV 책을 말하다의 진행자가 '탁석산' 선생으로 바뀌면서 첫 책이 바로 이 책문이었다.

물론 KBS가 노무현 정부의 개혁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인지
그날 패널들의 이야기는 주로 조선시대에 빗대어 현실 개혁의 어려움을 주로 성토하는 자리였다고 본다.

아무튼 공영방송 KBS가 권해주는 책이니 한번 읽어봐야지..

책문은 과거 시험 중 대과를 거친 33인의 최종합격자들에게 왕이 직접 묻는 질문으로 합격자들은 이 책문에 대한 대책에 따라 과거 시험 순위가 결정된다고 한다.
당대 국가운영의 중심이던 왕의 시대고민이 바로 책문인 것이다.

시급한 나랏일과 교육제도, 인재등용 등과 같은 국가운영의 고민들과 그에 대한 대책들을 읽어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게 없다는 사실...

벌써 12월...
올해의 10대 뉴스는 대강 감이 잡히지 않던가.
대통령 탄핵, 총선, 이라크 파병, 김선일씨의 죽음, 수능부정, 성매매단속, 부시 재선 성공 등

2004년이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오늘날의 시대의 물음 또한 옛날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의 대책은 어떻게 만들고 행할 것인가이지...

결국 중간에 골치 아픈 문제들을 다 넘기고나면 최종결론은 지구 정복!

움핫핫...


책문(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상세보기
김태완 지음 | 소나무 펴냄
책문이란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책문은 단순히 입신양명을 위한 통과의례가...이책에서는 수많은 책문 가운데 지금의...각 편마다 왕의 물음 책문과 선비들의 대답, 역자의 해설(책문 속으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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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까치글방, 7쇄 2003)

영국의 좌파 사학자 에릭 홉스본이 평가한 20세기다.
그가 단기 20세기라 표현한 시대는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1989년 소련 해체까지...

홉스본이 한나 아렌트가 '폭력의 세기'라고 이야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한마디로 정의 내린 것.
하긴 홉스본은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등 당대의 특징으로 '시대(age)' 구분을 잘 한다.

결코 만만치 않은 텍스트이고
실제로 번역이 x같아서 읽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텍스트이다.
수업시간에 강제로 읽지 않았다면 상권 1장 정도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에릭 홉스본...
이런 텍스트를 만들어낸 그의 내공에 놀랄 따름이다.
일국의 사회경제 상황만 연구해도 힘들 판에...
매 장마다 우리는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아시아로...
순식간에 공간이동을 하게된다.

물론 상권의 경우 설명을 하면서 하권 내지는 다른 책들을 참고하라는 이야기가 나와 상당히 당혹스럽긴 하지만
쭉 읽어가면 슬슬 내용과 내공이 쌓이면서 하권의 경우 상권보다 훨 쉽게 넘어간다.

물론 토론까지 겸한다면
매스컴 이론부터 각종 사회변동론, 역사, 철학,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난잡하게 존속하던 개인적 지식체계들을 어느정도 정리,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홉스본이 20세기를 평가하며 전망하는 21세기는 여전히 폭력적인 정치와, 폭력적인 정치적 변화의 세계로 남을 것이라고 한다.

'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 우리는 역사가 우리를 이 지점까지 몰고 왔으며 왜 그러했는가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ㄴ명하다. 인류가 인정할 수 있는 미래를 가지려 한다면 그것은 과거나 현재를 연장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세번째 천년기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실패의 대가는, 즉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경우의 결과는 암흑뿐이다.' (하권 799p)

쩝! 판단은 각자가~

마지막으로
반성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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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ing: Gael Garcia Bernal, Rodrigo de la Serna
Director: Walter Salles


올 하반기에 개봉한 다이어리 시리즈 중 둘째판.

별로 보고싶지 않던 S다이어리
보고 싶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11월 개봉이라 뻥 쳐놓고 12월에 개봉하는 브리짓존스의 다이어리2

'우리는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어느 선배가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인간.
샤르트르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칭했던 인간.
모든 억압에 저항하라! 라는 문구 뒤에 박혀있는 인간.

선배를 통해서 혹은 책을 통해서만 알게되었던 그는
우리사회에서도 이제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만큼 유명인이 되었다.

가끔 친구들이 입고 다니던 티셔츠 위에서
수능 준비 중인 사촌동생의 책장에서...

그의 젊은 시절 여행이 갖는 의미는 단 한 번의 길 떠남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유랑의 시작이자 동기였다는 것.
유랑 보다는 유목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정착사회의 사람에게 유목은 한때 꿈꾸는 낭만일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의 불안정성을 의미한다.
결국 여행의 궁극적 목적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던가.
돌아온 자는 그만큼의 보수성을 갖는다.
돌아옴의 밑바닥에는 떠나기 전의 생활에 대한 향수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로...
도보로...
배로...
뗏목으로...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오로는 체~
그리고 그 비행기를 바라보는 체의 친구 알베르토~

시간이 흘러 늙은 알베르토는 체를 싫은 비행기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 그 방향을 응시한다.
체는 이제 돌아오기에 너무 멀리 가버렸기 때문에...


꼬랑지 - 영화는 지루했다. 그리고 굉장히 선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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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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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청년 읽기
- 『시대의 얼굴, 절망과 희망 사이』(박종철출판사, 1999)를 읽고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흥분 속에 새천년이 시작되었다. 광화문의 시끌벅적한 밀레니엄 맞이가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될 때, 동해안 삼척의 어느 작은 항구마을 치킨집에서 맥주 한잔으로 맞이한 새천년은 기대나 흥분보다는 그저 별다른 감흥 없이 살포시 다가오는 일상과 같이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대망의 새천년 해돋이를 봐야겠다는 열망으로 떠났던 여행은 새벽부터 내린 비로 인해 여행 목적에 대한 회의감으로, 이는 또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감으로 밀려들며 뿌연 담배연기 같은 하늘 아래 늦잠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90년대 말의 절망감을 새천년 해돋이로 날려버리려 했던 건 어쩌면 너무나 큰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절망 속의 희망 찾기. 어디 이런 사람이 나 뿐이겠는가.

해방과 한국전쟁, 4.19, 유신체제와 80년 광주, 87년 6월과 90년대. 굵직굵직한 한국 근현대사의 사건 속에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년들에 대한 삶이 우리 문학사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손창섭에서부터 윤대녕, 신경숙까지... 작가 류소영은 '시대의 얼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소설 속의 청년들을 당시의 시대상황과 90년대 말 현재 사이에서 하나하나의 의미를 조명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청년의 모습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대학이라는 공간, 그 상대적으로 안온한 일상과 지독하게 다양하면서 또한 지독하게 희미한 가능성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들, 어떤 불가피한 상황과 그 상황 앞에서의 젊음에 대해...
그래, 청년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절망 속에 희망을 찾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자아를 완성해가는... 아직은 미완이기에 그 나름대로 아름다운, 절망을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짧은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해돋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들로 밀려있는 영동고속도로 위에서 꿈결 속에 90년대를 정리해본다. 여행기간 함께 해준 동욱과 건표에게 감사하며 머물고만 있는 청춘과 사랑이 아니기에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 2000년 입대 직전 후배의 부탁으로 학회지에 올렸던 졸문을 4년이 지나서 학교 어느 구석에서 발견하다. 당시의 나는 절망 속에 있었는지 희망 속에 있었는지 이젠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듯한 결말 속에서 '꿈'을 믿고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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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
소피 그리예 그림/안나 파츄스타 글
이철 옮김
오월, 1990


1840년대에 가서야 플로라 트리스탄이 최초로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국제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되었다. 트리스탄은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슬로건을 만들어낸 여성이었는데 훗날 맑스는 이 슬로건을 강조하게 된다.
- p.52

* 플로라 트리스탄 : 프랑스 출신의 이상주의자, 페미니즘의 선구자이며 노동조합의 강령을 전파하고 착취계급인 사주들과 투쟁, 후기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의 조모


누구나 자유에 대해 말하지만 자유를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은 적고, 자유를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은 자유를 말하고 능숙하게 떠벌리는 사람들에게 눌리게 마련이다.
- 1540년대, 영국, 윈스턴리, p.170


인간의 자유가 진보해 온 역사를 전부 살펴보면, 자유의 장엄한 요구에 응해서 이루어진 지배층의 모든 양보는 다 투쟁에서 생겨났음을 할 수 있다. 투쟁 없이는 진보도 없는 것이다.
- 1840년대, 미국, 프레드릭 더글라스, p.171

* 프레드릭 더글라스 : 본명 Frederick Augustus Washington Bailey. 메릴랜드 출생. 흑인 여자노예와 백인 남자 사이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1832년 볼티모어의 조선업자에게 팔려가 그 곳에서 일하면서 문자를 익히고, 1838년 도망하여 성을 더글러스로 바꾸었다. 1841년 매사추세츠주(州)의 낸터컷에서 개최된 노예제 반대대회에서 연설한 웅변을 인정받아 노예제 반대협회의 연사로 고용되어 영국 등지로 강연여행을 다녔다. 그 후 자유흑인이 되었고, 1847~1860년 뉴욕에서 노예제 반대 신문인 《노스 스타 The North Star》를 발행하였다. 1877년 컬럼비아 특별구 경찰서장, 1889년 주(駐)아이티 공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미국 정부 고위직에 임명된 최초의 흑인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저서로 《미국의 한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반생》(1845)이 있다.


정치적인 표현을 쓴다면,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보고 항의의 소리조차 높일 수 없을 만큼 무관심한 정당은 온건하고 실제적인 정당이지만, 지도자들의 인격이나 지도력의 문제에는 전적으로 무관심하되 고생하는 대중의 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열성적인 정당은 극단적이고 위험한 정당이다.
- 제임스 코넬리, p.172

투쟁의 시간까지는 혁명은 결코 실제적인 것이 못된다. 그러나 그때에 이르면 그것만이 실제적인 것이 되고, 보수주의자들과 타협주의자들의 모든 노력은 인간이 생각해낸 것 중 가장 무익하고 공상적인 것이 되리라.
- 제임스 코넬리,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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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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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 좋아뵈는 얼굴로 환희 웃고 있는 주인공은 마치 술자리에서 '괜찮아, 세상 별거 있냐!'라며 위로의 술잔을 권하는 친구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의 내뻗은 손 위에 소주잔이 쥐여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혼자만의 착각일까?


2.
추석연휴를 맞이해 내려온 고향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옛 친구의 부름에 술 한잔 나누고, 다음날 숙취에 아픈 머리를 감싸쥐며 동네 영화관을 찾는 것.


3.
이상을 위해 산다는 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가장 현실적 문제와의 충돌이다. 울려대는 전화벨이 반갑지 않은 건 때로는 받기 싫은 전화가 받고 싶은 전화보다 더 큰 삶의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습관처럼 '소화제'만을 반복적으로 찾는 이유는 관성처럼 흘러가는 생의 모습.


4.
'다시 시작할래~'
달려오는 기차를 맞이하며 부르짓던 설경구의 '돌아갈래~'가 아닌 혼자 마시는 술에 전화기를 통해 어머니에게 울먹이던 이야기. 꿈은 이제 원형에서 현실에 맞춰 변신을 한다.


5.
'행복?'
클래식 음악의 긴장감보다 오히려 천박하다 이야기했던 '상하이 트위스트'에서 우리는 행복할지도 모른다. 과거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끌어온 탄광촌에서 그 아비의 유희놀이가 아이들에게도 대물림 되었으리라. 신나면서도 슬픈 씬, 작은 일탈에서 주체는 더욱 변신의 속도는 더해만 간다.


6.
한 이상가의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아가는 여정. 그 여정의 끝은 죽음이겠지만 이제 중간 기착지에 내린 우리는 벚꽃 날리는 어느 봄날 옛 연인의 집 앞에 앉아 잘 받지 않던 전화를 먼저 걸고 있으련가? 중간 기착지는 회귀일 수도 있겠다. 회귀하는 모든 건 반동성을 내재하니까.


7.
영화는 희망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이는 철저히 반동의 중독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아프고, 그래서 다섯명 밖에 들어차지 않은 영화관 맨 뒷구석에서 그렇게도 울었나보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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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