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읽고느끼고'에 해당되는 글 70건

  1. 2005.04.04 1969년 청춘의 한 때... by 망명객
  2. 2005.03.28 대화 - 노교수님의 마지막 과제 by 망명객
  3. 2005.03.14 Wit - 콤마, 그 숨고르기의 순간이 있기에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라 by 망명객
  4. 2005.03.09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by 망명객
  5. 2005.02.26 프루프 - 자기 존재 증명, 그 지리한 과정의 연속 by 망명객
  6. 2005.02.22 볼 수 있는 어둠 by 망명객
  7. 2005.02.06 웃어야지 - 쿵푸허슬 by 망명객
  8. 2005.01.22 스완다이브와 명랑운동회 by 망명객
  9. 2005.01.21 그림자... by 망명객
  10. 2005.01.17 봄날 그리고 섬 by 망명객
69 식스티 나인 상세보기

69는 70의 이전 숫자이고 68의 다음 숫자이다. 영화 69(Sixtynine)이 그 서두에서 68년에 해체를 선언한 그룹 Cream의 ‘White Room’으로 시작하는 건 단절된 69년이 아닌 1968년에서 이어지며 1970년으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는 듯하다.


Posted by 망명객
『대화』(리영희, 대담 임헌영, 한길사, 2005)

리영희 선생님은 이 책 서두에서 자신의 마지막 저술이라 밝히셨다.

#1.

1999년, 진정한 학자 혹 선비라 불릴만 한 이강수 선생님의 정년퇴임식에서 리영희 선생님을 처음 뵐 수 있었다. 이강수 선생님은 퇴임사에서 헌정논문집 서두에 자신에 대한 리영희 선생님의 찬사를 두고 첫 말씀을 꺼내셨다.

"리영희 선생님은 평생 진실만을 말씀하실 것 같더니 오늘 처음으로 거짓말도 하시는 걸 알았다.(자신에 대한 찬사를 두고)"

물론 내 기억력의 한계로 꼭 저렇게 말씀하셨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대학 3학년 시절, 지사적 삶으로 시대를 풍미하던 한 지식인과 학문에 대한 열정적인 자세로 큰 모범이 되신 노교수님 사이의 농담 같은 이야기는 내게 알 수 없는 파장을 일으켰으니 마치 강호의 두 고수가 주고받던 선문답에서 느낄 수 있는 남자의 로망과 같다고 해야할까.


#2.

리영희 선생님을 계몽적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혼자 독점할 수 없는 것으로 이웃과 나눠야 하기에 글을 쓰셨고 그것이 바로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라고 말씀하셨던 그 분의 삶은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탄압과 사상의 은사라는 존경의 극단적 평가의 경계에서 힘든 외줄타기와 같았다.'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선생님은 자신의 지난 세월에 대해 반추하며 이후 세대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이제는 거의 지나가버린 그 시대를 인간적 고통과 분노, 상처투성이의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기성세대나, 앞 세대들이 심고 가꾼 열매를 권리처럼 여기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맛보고 있는 지금의 행복한 세대의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하고 자신이 그 상황에 직면했거나 처했다면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보기를.”


#3.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편다.천재라 불리우던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어내곤 한다. 특히 요절한 천재들의 경우가 많은데 실질적으로 평가는 그들의 사후에야 제대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연륜이라는 것이 한번에 완성되는 경우는 없다. 리영희 선생님 또한 이 책에서 자신의 부끄러웠던 기억들을 담아내고 계신다. 자신의 마지막 책에는 사상과 인간의 변증법적 합일을 이루려는 듯이 말이다.


#4.

유시민씨가 처음으로 국회에 모습을 드러내던 날, 난 그의 케쥬얼한 복장에 박수를 보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정장을 차려입은 유시민씨는 국회에서 “이제 제대로 된 복장이 맞습니까? 절 꾸짖어 주시던 선생님도 계시더군요”라고 이야기했었다.그 사이 학교에서는 유시민씨의 특별강연이 있어 리영희 선생님은 지팡이를 짚고 학교에 오셨었고 선생님은 유시민씨를 불러 호되게 꾸짖으셨단다. 물론 이건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선생님은 유시민 씨가 사소한 것에서 문제의 빌미를 일으키냐고 그러셨단다.난 이 에피소드를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면 젊음이란 그 독창성에 기대어 너무 경박하지 않던가.


#5.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그만큼 여러 물음을 던져준다. 쉽게 답변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물음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게 앞으로 내게 주어진 과제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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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지음 | 한길사 펴냄
스스로 60% 저널리스트, 40% 아카데미션 이라고 말하는 리영희의 글이 학자들에 의해 가장 영향력 있는...1970~80년대가 지나고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민주화를 거둔 1990년대 이후 리영희는 내가 할 역할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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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일시 : 2005. 2. 11 ~ 3. 27
* 공연장소 : 우림청담씨어터
* 제작 : 송승환, 이광호
* 원작 : Margaret Edson
* 연출 : 김운기
* 관람일 : 2005. 2. 25


아직 뇌가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에는 조금 이른 아침 9시, ‘오늘 컨디션 어떠세요? 기분은요?’ 밝고 높은 여강사의 목소리는 창문 가득한 낮은 회색 구름들과 확연한 대비를 이루며 고막을 때려댄다.

연극 위트 또한 그랬다. ‘안녕하세요. 오늘 컨디션 어떠세요?’, 윤석화의 목소리도 그녀의 환자복과 대비를 이루며 내 고막을 때려댔다. 이제 두 시간 뒤면 무대 위 자신은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독백은 죽음의 시기를 알고 있는 시한부 인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냉소가 느껴졌다. 교수라는 극 중 인물의 지적 치기에서 오는 냉소이리라.

‘난 나를 넘어섰다’, ‘역사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에게 늘 열심히 살 것을 강요한다. 열심히 달리는 그 끝에는 성공이란 열매가 있다지만 성공이란 매우 달콤하면서도 냉정한 이중성을 지닌다.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열심히 달리던 그 끝, 주변에 친구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허무함은 그 어떤 성공의 달콤함으로도 달랠 수 없는 것이리라.

문득 어느 소설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친구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주인공은 죽은 친구의 살아생전에 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본 적이 없었다고 읊조린다. 극 중 베어링 교수 또한 그랬다. 상아탑의 세계에서 자신이 연구하던 '존 던'의 시 세계에 빠진 그녀는 주변인들에게 소홀했고 쉰 살이 되도록 혼자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던 그녀의 삶에 ‘난소암’이라는 신파조의 구름이 갑자기 찾아들었다.

극은 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마감한다. 죽음의 그늘 밑에 서 있는 그녀에게는 ‘안녕하세요. 오늘 컨디션 어떠세요? 기분은요?’ 라 물으며 그녀를 한 명의 환자로만 대하는 병원 사람들만이 있었다. 예외라고는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내주는 간호사 정도일까.

고등학생 시절, 어느 친구가 선물로 건내준 시집 속지 위에 쓰여진 ‘삶과의 투쟁이 아닌 공존으로...’ 라는 글귀를 떠올리게 되었다. 난 삶은 투쟁이 연속이고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라 생각하며 그 글귀를 잊고 지냈다. 그러다 공존과 투쟁이 꼭 대척점에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투쟁이지만 그 과정은 사람들과의 공존이란 룰을 따라야 한다는 것. 그게 삶이다.

함께 연극을 본 친구, 그 친구도 참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였다. 2년 전이던가 말다툼 끝에 서로 연락을 끊고 지내던 그 친구가 어느날 내게 메일을 보낸 것이다. 지난 시간 무엇인가를 쫓아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열심히 뛰었다는 친구. 그렇게 바라던 그 무엇인가를 손에 쥐었을 때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다시 메일을 보내온 친구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죽음은 자만하다. 이 세상 생명은 모두 유한한 존재이기에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늘상 우리 곁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기억하자. 세상의 죽음이 모두 기쁠 수는 없지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그건 콤마, 즉 숨고르기의 순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and death shall be no more (콤마) death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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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한강, 열림원, 2003


"사랑이 아니면..."
.............................하고 마흐무드는 중얼거렸다.

"생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는 덧붙여 말했다.

"사랑 없이는 고통 뿐이라구."

"하지만 때로는"
...............................하고 나는 반문했다.

"사랑 그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나요?"

...............................마흐무드는 생각에 잠겼다.

"아니지, 그렇지 않아."
...............................그의 음성은 숙연했다.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지.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
사랑 그 자체는 그렇지 않아."


내 오감은 지난 겨울 내내 봄 소식에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온 몸을 돌던 수분은 옷매무새를 뚫던 바람이 훔쳐가 말 그대로 건들이면 부서질 것 같은 푸석푸석한 시간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리라.

우스개 소리로 이야기하던 자유로운 영혼은 술잔에서도 그 어느 낯 선 거리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새천년의 겨울은 늘 그렇게 푸석푸석한 시간을 견디는 시간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눈썹, 화장기 없는 얼굴, 『여수의 사랑』과 『내 여자의 열매』의 책 날개에는 그렇게 수수하면서도 두 눈은 유난히 빛나던 한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절제된 어둠을 유난히 좋아했다.

『사 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한강의 산문집은 그녀의 여타 소설에 비해 따뜻함을 머금고 있다. 주변 인물들에 대한 열린 시선과 관심, 그녀는 이 책날개에서는 활짝 웃고 있다. 여전히 수수한 모습 속에서 특별한 영혼을 상징하듯 빛나는 눈빛을 품고 있다.

기 억에도 온도가 있다. 생각할수록 싸늘해지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돌이킬수록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기억이 있다. 돌이킬수록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기억, 그리고 싸늘해지는 기억조차 다시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그녀의 글귀들이 봄이 오는 길목에 한 줄 따뜻한 봄 햇살처럼 내 마음을 보듬고 있다.


Posted by 망명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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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일정 : 2005년 2월 4일 ~ 3월 13일
* 공연시간 : 화-금 7시 30분/토4시,7시 30분/일,공휴일4시
* 공연장소 :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 원작 : David Auburn
* 연출 : 김광보

<2005/02/20 관람>

압구정을 떠난 버스는 대학로 입구 언저리에서 정해진 노선을 우회해 돌아가고 있었다. 버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깃발 물결이 버스의 노선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로 주변을 스치는 전투경찰들과 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는 뉴스를 접했기 때문에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우연히 맞닥뜨린 집회현장은 내게 객관적인 하나의 사건 현상일 뿐이었다.

비정규직의 권리를 보장하라! 불법파견 금지하라!

누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문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 개체로서의 존재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등 사회구조 속에서의 관계까지 말이다. 실존의 문제가 어디 사춘기 시절에만 품게되는 문제일까. 매 순간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노력한다. 끊임없는 자기 존재 증명의 과정, 그것이 삶이니까.
 
정신적 장애를 겪는 천재 수학자의 딸이자 뉴욕에서 커리어를 쌓아가는 금융분석가의 동생이며 젊은 수학자의 연인인 캐서린. 그녀는 '누구의 무엇'이란 관계 속에서의 존재가 아닌 자신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새벽마다 수학에 몰두한다. 물론 사회적 편견은 못다한 학위와 아버지의 정신 장애를 빌미로 그녀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그 성과는 그녀가 이루어낸 자기 증명이다.

개인적으로 번역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특히 문학작품의 경우 등장인물의 이름과 배경장소 등에 대한 이질감은 내게 가독성에 상당한 장애 요소가 되곤 한다. 이건 아마 내 빈곤한 상상력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지. 추상미, 최용민, 추귀정, 최광일 두 사람의 추씨와 두 사람의 최씨가 펼치는 연기는 별도로 치더라도 연극 내용 자체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추운 날씨와 약간의 피곤함, 따뜻한 극장 안에서 무거워지는 눈꺼풀과의 사투는 그 시각 관객으로서의 내 존재 증명이었겠지.

연극 프루프의 제목 앞에는 '추상미의'란 수식어가 붙어있다. '누구의 무엇'식의 작명을 정말 싫어하긴 하지만 그런 타이틀을 달고서라도 상품을 팔아야겠다는 절박한 의지가 느껴지니 조금 서글퍼지는 것도 사실이다.

연극은 끝났고 고픈 배를 부여잡고 추운 대학로 밤거리로 나섰다. 깃발과 인파로 가득하던 대로는 다시 차량들로 채워졌고 난 내 생존을 위해 저녁식사 메뉴를 고민해야 했다.

모든 개체는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으며 끊임없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며 살아간다. 살아있는 개체에게 투쟁은 하나의 존재 증명이며, 군중 집회는 그 다양한 증명 방법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런 현장에는 늘 삶을 유지하려는 생명연장의 애절함이 묻어난다. 피켓을 든 사람, 깃발을 든 사람, 팔뚝질을 하는 사람, 그 모두가 생존이란 존재의 문제를 길거리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권리를 보장하라! 불법파견 금지하라!
Posted by 망명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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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0, 뤼미에르 갤러리>


어둠은 빛의 반대말이다. 인류는 남자와 여자로 나뉘고 세상에는 낮과 밤이 존재하며 인간에게는 기억과 망각이 있다. 볼 수 있는 어둠? 자못 이율배반처럼 들리는 타이틀이 끌리는 건 세상 사 모두 안티노미처럼 흘러가는 것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키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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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Ackerman. Atlanta. 1997. Gelatin silver print. 출처 : 갤러리 뤼미에르 http://www.gallerylumiere.com]


회화는 사진에게 시대의 기록이란 영역을 넘겨주었다. 이제 팩트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진 회화는 사물이 아닌 인간 정신의 창조적 재현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고 후발주자인 사진 또한 회화를 따라 팩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 한다.

어떤 분은 '진정한 사진은 다큐뿐이지'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진에 대한 내공이 모자란 나로서는 연출이 가미된 예술사진 또한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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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Ackerman. (untitled). 2000. Gelatin silver print. 출처 : http://www.agencevu.com]


대부분의 사진이 'untitled'로 한자어로 돌리면 '無題' 정도 되겠다. 학생들의 시화전을 둘러보면 작은 공통점을 하나 찾을 수 있는데, 그건 바로 '無題'라는 제목의 시화를 어느 시화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시화전을 자주 찾던 시절에는 '無題'라는 제목의 시화에 제일 낮은 점수를 매기곤 했다. 자신이 쓴 글에 '無題'라는 제목을 붙이는 건 자신의 글에 대한 방기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표제가 작품의 내용을 모두 추스를 수는 없다. 이젠 그걸 알기에 '무제'라는 제목 아래서는 제목을 붙이는 재미를 즐긴다. 물론 제목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그저 내가 보고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고 재해석하면 그만인 것이니까.

위 사진 속에서 '격정'과 '정점'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만해 선생은 첫키스의 순간을 날카롭다고 표현했지만 격정의 정점이 늘 날카롭게 추억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가끔씩 찾아오는 현기증처럼 격정의 정점은 주변 사물의 외곽선을 허물어뜨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존재까지 허물어 버린다. 정점의 순간을 떠올릴 때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인 묘사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은 인식하는 주체가 정점에 매몰되기 때문이겠지. 고로 신림동 최군의 연애는 연금술이라는 이야기에 깊이 동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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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Ackerman. (untitled). 2000. Gelatin silver print. 출처 : http://www.agencevu.com]

사진 앞에서 '레옹과 마틸다'라 조용히 읊조리다 함께 간 친구가 '퐁네프의 연인들'이라 칭하자 그의 말에 쉬이 동의를 보냈다.

내게는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 걸쳐있는 '퐁네프의 연인들'. 위 사진을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던 시간, 다리 위 드니 라방과 줄리엣 뷔노쉬의 열정적 춤사위에 대한 기억을 뼈 속에 새기는 공감의 순간이라 이야기하자.

막상 이렇게 스토리 한편을 꾸며가려니 렌즈를 응시하는 듯한 여성의 눈빛이 불안함으로 다가온다. 정점은 순간일 뿐, 다시는 그 순간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불안 말이다. 순간에 대한 집착은 그렇게 불안을 잉태한다. 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지 않던가. 잠식당한 영혼, 영혼에 대한 구제가 지상 위 종교의 존재 이유라는데, 망상은 이렇게 줄줄이 비엔나처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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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Ackerman. Tuscan, Italy. 2000. Gelatin silver print. 출처 :갤러리 뤼미에르 http://www.gallerylumiere.com]


볼 수 있는 어둠. 빛과 어둠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보완적 관계이다. 아니 빛이 어둠보다 상위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이니까.

어두운 방안에서 내 몸의 뼈와 근육 그리고 신경조직까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멀어져 갈 때, 창가 블라인드 사이로 고개 내미는 네온사인 빛줄기가 내 귓가에 불면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시간, 몸은 죽었지만 정신은 또렷한 그 시간을 죽도록 싫어하긴 했지만 이젠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으리라. 순간은 순간일 뿐이니까.



- 이 글을 쓰다가 이은주 씨의 자살소식을 접했다. '우울증'을 자살 원인으로 보도하는 뉴스를 접하며 우울도 즐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냉소적이면서도 이지적인 이미지의 그녀를 앞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긴 하지만 고인이 부디 우울증 없는 곳에서 편안하길 빈다. 그래서 오늘 눈이 내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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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겨울 거리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질적인 사투리와 상실된 방향감각, 익숙하지 않은 유랑 일정이 육체적 피곤함을 불러일으키는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는 보도블럭 사이사이로 우울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이럴 땐 아무 생각 없이 웃어야한다며 일행과 함께 부산 서면의 롯데백화점 내 극장을 찾았다.

주성치의 '쿵푸허슬'.

결론은 대 만족.

정말 오랜만에 보는 홍콩영화다. '소림축구'도 케이블 채널을 통해 봤으니 극장에서 보는 홍콩영화는 천삼백이십칠년만인 듯하다. 오우삼, 주윤발, 성룡, 이연걸 등 어린시절 우리를 환호하게 만든 이들은 어느새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젠 주성치만 남은 것. 물론 '쿵푸허슬' 조차 헐리우드 자본이 만들어낸 작품이긴 하지만 서구인 한 명 나오지 않는 홍콩영화 그 자체로 인정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젠 황량한 벌판만 남은 곳에 독야청청 남아 있는 초인이 있어 아직도 우린 홍콩영화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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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1
홍대롤링홀

1월 초부터 보고 싶었던 라이브 공연. 도대체 몇 년만에 홍대 근처를 배회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감회가 새로울 뿐.

오프닝밴드로 클래지콰이가 나온다고 들었으나 늦게 입장한 관계로 먼저 끝났는지 아니면 나오지 않았는지 실제로는 일본애들인 Swinging Popsicle과 Mondialito만 기억에 남는다.
특히 Mondialito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인 친구 넘 잘 생긴듯... 79년 12월 생... ㅋㅋ 뒷조사까지 끝냈다.

아무튼 테네시주 네쉬빌에서 날아왔다고 자신들을 소개한 스완 다이브의 공연은 가볍고 즐겁게 진행되었다. 막간이 좀 길었을 뿐. 간만에 만만한 가격으로 괜찮은 라이브 공연을 본 듯해 기분마저 흐뭇하다. 다만 스탠딩 콘서트를 즐기기에는 슬슬 육체적 한계가... ㅠ.ㅠ

저작권법 때문에 배경음악 사용하지 않은 점 이해하시라.

뭐... 구해서 들어보세요... 짜증날 때, 우울할 때...
세상 밝게 살아야죠~

유후~
슬슬 미쳐가나보다.



노라 존스 공연 보고프다~ 근데 가장 싼 티켓이 5만원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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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

그림자...

보고읽고느끼고 : 2005. 1. 21. 13:24
『약속 없는 세대』, 윤후명, 세계사, 1990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내가 있다. 사내가 늘 찾는 건 눈 앞 가득한 푸르름. 신분이 불확실한 사내에게 시인이란 직함이 잘 어울리는 건 푸르름의 꿈을 찾아 도망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 대에 30대의 삶에 대해 구체적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어느 우익단체의 가두집회 현장 근처에서 말 걸어오던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처럼 난 지금 나이의 권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 20대가 되었을 땐 30대의 나 자신을 떠올릴 수 없었고 당장 내일의 내 모습조차 알 수 없었다. 하루하루의 불확실성을 즐기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불확실성을 즐길 수 있었던 건 지키고 싶은 무언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푸르름을 찾아 나선 시인은 결국 푸르름의 그림자만을 밟을 뿐이었다. 기사도 이상 수립을 위한 돈키호테의 모험이 한낱 그림자 밟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유신이 어땠고 10.26 사태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역사적 기억들이 각 개인의 존재와 강하게 중첩되어 있는 국민이 또 있을까.

폭압적 사회에서 낭만주의적 인물은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 종국에는 푸르름을 간직한 아내도 그의 곁을 떠나버리는 약속 없는 세대, 그래 당장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그에게 가족 또한 미래를 함께 담보할 수 없는 집단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야기처럼 외로움이란 병원체에는 항체가 없어서 면역이 되지 않기 때문이겠지. 우리는 그 외로움이 두려워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이 밟았던 푸르름의 그림자. 그래 그 그림자는 이제 죽었다. 타살인지 자실인지 알 순 없지만 어느 겨울 어느 산천에서 약속을 잃어버린 채 동사해 죽었단다. 슬픔? 모든 사물은 그림자를 갖고 살아간다. 그림자가 없는 사물은 유령일 뿐. 술픔을 느끼기 전에 공포를 느낀다.



책 표지 다음 장에는 이 책 첫 주인의 메모가 남겨져 있다.

만날수있었던인연이니까
헤어질수도있다는거지.
가끔씩이라도떠오를수있다는얼굴이니까
아주지우려구한다는거지.
가을에는그냥코스코스가피고진다는걸루만족하고싶다는거지
90.10.29

1990 년 어느 가을날 이 메모를 남긴 이는 오늘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의 희망처럼 아주 지우려던 얼굴을 잊고 잘 살고 있을까? 아니면 해마다 피어나는 코스모스를 보며 불쑥 지우려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까? 현재의 그에게 그림자가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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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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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비양도>



1.
추운 날씨와 새해 맞이 긴장감이 겹쳤는지 약간의 감기기운과 함께 이불 속 안락함의 여유를 져버리기 아쉬워 늘어진 아침잠을 즐겼어. 점심인지 아침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식사 후 톡 쏘면서도 달콤한 유자차 한 잔과 함께 텔레비전 화면 위 고현정의 얼굴에 주목하면서 말야. SBS 특별드라마 '봄날'의 재방송, 이번 주말 내내 관심을 갖고 본 드라마...

2.
그래, 그곳은 섬이었어. 정겨운 돌담길, 익숙한 바다와 하늘 그리고 억새. 화산의 뜨거움은 그렇게 삶이 되어 어느새 천년 세월을 지켜왔으니 그곳이 바로 비양도야. 사람들은 '섬'이란 단어에서 쉽게 여름을 떠올리지.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한 휴식처, 도시의 일상과는 다른 삶이 존재하리라는 꿈 말이야. 그런데 그거 아니? 당신이 꿈꾸던,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그 섬에서도 일상의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 힘들고 고된 일상이 존재하는 곳이 섬이야.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 내게 바다는 익숙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낯선 죽음과도 같은 이름이었어. 우리 동네 구석진 곳 몇 백년 동안 바다를 마주보던 큰 나무 밑에는 돌담으로 둘러쌓인 기도처가 있지. 바다에서 삶을 영위할 사람들의 안녕과 불의로 바다에서 맞이한 죽음을 달래기 위한 공간. 그 공간은 돌담 위 눌러 붙은 촛농과 빛 바랜 오색의 천 조각들 사이에서 간절한 희망과 비통의 눈물을 품고 있어.
여름날 집 앞 좁은 도로 위에서는 기름때 절은 민소매 셔츠를 걸친 채 어부 아저씨가 종종 줄담배를 피워대며 그물을 손질하곤 했지. 아저씨의 몸에서는 푸른 바다 냄새보다 가난의 소금 냄새가 피어났어. 물론 틀니를 보이며 주름 속에서 피어나던 아저씨의 웃음에 나 또한 웃어보이곤 했지만 그 가난의 소금 냄새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어.

3.
아직은 추운 겨울이야. 봄날이 과연 봄날까지 계속 방송할지 잘 모르겠어. 추운 겨울날 '봄날'이란 타이틀을 건 드라마라니... 글쎄, 떠들썩했던 '고현정'의 컴백 작품치고는 좀 뻔한 스토리가 아닐까도 싶지만, 극이 '섬'이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시작하니 내 관심이 높아진 건 사실이야. 지진희의 연기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더라도 어느덧 좋은 연기자가 된 조인성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더라구. 당분간은 주말에 몰입할 무언가가 생겼다는 게 기뻐.

4.
Damien Rice
서핑 중 발견한 좋은 노래. '쌀'아저씨로 부르기로 결정한 이 아저씨의 팬 페이지에는 대표곡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곡들을 mp3로 다운받을 수 있더라구. 영국 아저씨들이 참 음울한 노래를 잘 만드는 듯해. 방방 뛰는 노래들의 대다수도 그 모티브는 음울함이니 섬나라라 그런가?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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