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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18 강물이 되고 별이 되고 꽃이 되면서 by 망명객
  2. 2007.05.15 도둑과 이웃 by 망명객
  3. 2007.05.14 시집 by 망명객
  4. 2007.05.13 귀향 그리고 새출발 by 망명객
  5. 2007.05.12 돌아온다는 건... by 망명객
  6. 2007.05.12 길... by 망명객
  7. 2007.03.20 서울, 한 치 틈도 없는 공간 by 망명객
  8. 2007.03.12 길을 물어보는 사람 by 망명객
  9. 2007.02.08 드림카카오 by 망명객
  10. 2006.11.08 문화의집 기자회견 by 망명객


강물이 되고 별이 되고 꽃이 되면서

 

신경림

 

 

강물이 어찌 오손도손 흐르기만 하랴

큰물이 작은 물을 이끌고

들판과 골짜기를 사이좋게 흐르기만 하랴

어떤땐 서로 치고 받고

또 어떤땐 작은 물이 큰물을 덮치면서

밀면서 밀리면서 쫓으면서 쫓기면서 때리고 맞으면서

시게전도 지나고 다리밑도 지나는

강물이 어찌 말없이 흐르기만 하랴

 

별들이 어찌 늘 조용히 빛나기만 하랴

작은 별들과 큰 별들이 서로 손잡고

웃고 있기만 하랴

때로는 서로 눈부라리고 다투고

아우성으로 노래로 삿대질로 대들고

그러다 떠밀려 뿔뿔이 흩어도 지지만

그 성난 얼굴들로 그 불뿜는 눈빛으로

더 찬란히 빛나는 별들이

어찌 서로 그윽히 바라보기만 하랴

 

산비알의 꽃들이 어찌 다소곳 피어 있기만 하랴

큰 꽃이라 해서 먼저 피고

작은 꽃이라 해서 쫓아 피기만 하랴

빛깔을 뽐내면서 향기를 시새면서

뒤엉켜 싸우고 할퀴고 허비고

같이 쓰러져 분해서 헐떡이다가도

세찬 비바람엔 어깨동무로 부둥켜 안고 버텨

들판을 산비알을 붉고 노란 춤으로 덮는

꽃들이 어찌 곱기만 하랴

 

산동네의 장바닥의 골목의 삶이 어찌 평화스럽기만 하랴

아귀다툼 악다구니가 잘 날이 없고

두발부리 뜸베질이 멎을 날이 없지만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엉켜

제 할일 하고 제 할말 하면서

따질 것은 따지고 밟을 것은 밟으면서

강물이 되고 별이 되고 꽃이 되면서

산동네의 장바닥의 골목의 삶이 어찌 밝기만 하랴

 

------------------------------------------------------------------------------




망명객에게.
 
고등학교 때 산 건데, 빛이 많이 바랬구나. 그래도 읽어줄 수 있겠지? 물론...!! 우리, 바위를 향해 나는 계란의 무력함을 당장 가졌을지라도 기꺼이 계란이 되자! 칼 날처럼 날 선 세상에서 무릎 꿇곤 살지 말자! 우리에겐 정의를 부르는 용기가 있다. 그리고 서로를 따뜻하게 비춰주는 가슴도 있다. 우리는 빛나는 청춘인 것이다. 빛고을에서 준규가... 98.3.5 
자신과의 투쟁으로부터 시작!

 

------------------------------------------------------------------------------

 

해마다 5.18이면 빛고을에 사는 친구가 떠오릅니다. '80광주'라는 ID를 사용하던 친구죠.

 

스무살 무렵, 그 친구와 저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고등학교와는 다른 대학사회, 신입생은 자기의 언어를 배우기보다 선배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담아내기에도 벅찬 존재였습니다. 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으며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는 과정들. 글쎄요,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전 음악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눴는지도 모릅니다. 서로에게 상처주기 싫은 마음에...

 

옛 일기를 들추듯, 손때 묻은 이 시집을 들출 때면 귀 끝이 화끈거리곤 합니다. 이제 스무살에서 열을 더해야 하는 나이. 이젠 연락조차 닿지 않는 그 친구는 어찌 살고 있으며, 저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요?

 

다시 5.18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반 년 앞두고 벌써부터 텔레비전 브라운관에는 헛된 만남과 거짓 웃음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언어의 칼날을 쉬이 휘두르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러한 칼부림은 쉬이 상생과 화합이란 명분으로 치장하곤 하죠. 그건 여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절박함은 쉬이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노래로 칼을 세우고, 그 칼을 가지고 바람을 재우는 법을 아는 것이겠죠. 모든 사람이 강물이 되고 별이 되고 꽃이 될테니까요.

 
 
 
얼굴조차 모르는 그 친구가 보고싶은 하루입니다.
보고싶다 준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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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과 이웃

길위에서 : 2007. 5. 15. 00:02

어느덧 신림동으로 이사온지 여섯 달째로 접어들고 있다.

 

한 사람의 주민으로서 동네 초등학교에서 추위에 떨며 동네 방위의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는 예비군이기도 했고, 새로 구입한 자전거를 타고 어슬렁 거리는 백수이기도 하며, 공원에서 동네 아줌마들의 틈바구니에서 조깅을 즐기는 젊은 총각이기도 하다. 편의점이나 대형할인마트보다 동네 재래시장의 인심에 슬슬 익숙해지고 있으며, 가끔 주인 없는 방을 찾은 택배를 찾으러 근처 세탁소를 찾기도 한다. 동네 술친구가 없는 게 좀 흠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술값을 굳히는 효과가 있으니 딱히 슬퍼할 일이 아니라 위안한다. (물론 자전거를 타고 좀 올라가면 신림동이란 고유명사에 이어 쉬이 연상되곤 하는 고시촌에 몇몇 지인들이 있긴 하지만, 난 더이상 착한 어린양들 앞에 술병 나발불며 나타날 옛 주정뱅이가 아니란 말씀. ㅋㅋ)

 

그러나 원룸형 건물이 갖는 아쉬움은 거주자의 연령대가 어린 관계로 이웃간 소통이 없다는 것. 뭐, 나이가 대수겠는가. 대부분의 원룸이 그렇듯 생활의 여러 영역 중 휴식과 취침의 공간이란 의미가 유독 강한 곳이 원룸이기 때문이겠지. 생각해보니 이웃들과 마주친 경우도 참 드물었다.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 머물던 고시원이란 공간보다도 더욱. 고시원은 그래도 공동시설을 이용하니 어떤 인간들이 이웃으로 사는지 안면이라도 익힐 수 있는 곳인데...

 

이사온지 6개월. 처음으로 옆 집 이웃과 이야기를 나눴다.

늦은 저녁 조금은 민망한 차림새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초인종이 없는 관계로 문을 두드리는 건 겨우 택배기사 아저씨가 전부인데,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민망함을 감추고 문을 여니 옆 집에 산다는 아가씨가 말을 건넨다.

 

"저기 죄송한데, 어젯밤에 창 밖으로 무슨 인기척 들으신 거 없으신가요? 제 방에 도둑이 들어서요."

 

아가씨의 이야기로는 창문 단속을 안 하고 방을 비운 사이 자기 방에 도둑이 들어 노트북을 훔쳐갔단다. 그래도 이웃이라고 한갓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까, 조심스러우면서도 근심어린 물음을 던졌겠지만 나도 방을 비웠던 시간이라 그저 얼버무릴 수밖에. 그래도 이웃의 일이라 경찰에 신고는 했는지, 몇 시 정도에 일어난 일인지 등을 물어보고 앞으로 창문 단속 잊지말라는 당부까지 챙겨주었다.

 

방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처음으로 옆 집 이웃과 나눈 대화가 우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도둑이 들었다는데 그 앞에서 통성명이나 하고 친하게 지냅시다는 류의 이야기를 꺼낼 순 없지 않겠는가. 이사 올 때 떡이라도 돌릴 걸 그랬나.

 

어차피 날씨가 추워지면 고향에서 또 며칠이 멀다하고 귤박스가 올라올 것이고, 그때나 되면 귤이 박스 안에서 썩기 전에 나눠먹자며 옆 집 문을 두드릴 수밖에.

 

아무튼 오늘의 교훈은 "잊지 말자, 창문 단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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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길위에서 : 2007. 5. 14. 00:04

어느덧 시인은 아닐지언정 시인이 되어있어야 할 나이가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연역이든 귀납이든 논리적 인과관계의 틀거리에 맞춰진 삶은 가끔 숨막히듯 사람을 죄어오곤 합니다. 그렇게 생활은 운문보다 산문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은 시집을 들추었고 장마다 쏟아지는 시어들 속에서 삶의 여백을 찾곤 했었습니다.

 

여러분의 책장에는 어떤 시집이 꽂혀 있나요?

소설과 달리 시집은 손때가 타야 재맛이죠.

 

특히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시집이라면 그 마음은 더욱 아련합니다.

한 권의 책보다 한 병의 소주가 아쉽던 시절.

단돈 오천 원 미만의 선물로 시집만한 선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


그동안 네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애쓴 것 같다. 도와준다는 말이 맞을지는 모르지만 암튼 그렇게도 내가 잘못했다고 본다~. 달력은 3월로 가기위해 분주한데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아프다. 그냥 많이 힘들었거든. 그래서인지 평소에 별로 좋아한 적 없는 봄이 이제는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 열심히 해. (당분간 학원에서 볼테지만...) 급하게 시집을 골라서 잘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넘기다가 맘에 드는 구절이 있더라. '어둠 속에 마음을 가다듬으라, 장거리 원정에서는 새벽 폭풍에 대비하거니와 층층이 빛은 기대하지 말라' 항상 네가 삶과의 투쟁이 아닌 공존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고생 많았다. 안녕. 96. 2. - **

------------------------------------------------------

 

북쪽

 

 

기다란 해변으로,

망치 맞은 만(灣)의 발치로 돌아오니

대서양 천둥의 세속적인

힘만이 보일 뿐.

 

나는 신비할 것 없는

아이슬랜드의,

그린랜드의 나약한 식민지의

초대를 받고, 그리고 문득

 

저들 유명한 침략자,

녹슬어가는 자기네 기다란 검으로

잣대질당하며

오크니와 더블린에 누워 있는 자들이,

 

돌로 지은 배 단단한 선창에

있는 자들이,

녹은 개천 자갈밭에서

도끼질하고 반짝인 자들이

 

바다에 소리 죽었어도

폭력과 직관으로 되살아나

내게 경고하는 목소리임을 깨닫는다 :

기다란 배의 헤엄치는 혀가

 

뒷새김을 남겨 놓았다 -

말하기를 토르의 망치는

지리와 무역에 따라 휘둘렸고,

아둔한 짝짓기와 복수,

 

증오와 온갖 것의 등 뒤에는

거짓과 여자가 있고,

지침이 평화로 자리잡고,

기억은 쏟은 피를 배양했노라.

 

말하기를, "말(言)의 보고에

눕고, 주름 잡힌

네 머릿속 사리와

번득이는 기지에 파고들라,

 

어둠 속에 마음을 가다듬으라.

장거리 원정에서는

새벽 폭풍에 대비하거니와

층층이 빛은 기대하지 말라.

 

고드름 속 기포처럼

네 눈을 틔워 두고,

네 손에 닿았던

진짜 보물이 무엇이었나 하는 느낌을 믿으라."

 

 

------------------------------------------------------

 

본격적으로 대입을 준비해야 할 고3으로 넘어가던 시절에 선물받은 세이머스 히니의 "한 자연주의자의 죽음".

글쎄요,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던 메세지처럼 이 책을 받은 이후 책을 건네던 친구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교보문고의 문학코너에서 모 동인지에 실린 친구의 시를 통해 아직 글을 쓰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삶과의 투쟁이 아닌 공존으로 살아가길 빈다는 친구의 이야기처럼 우린 모두 공존을 위해 살아가죠. 현실은 늘 힘겨운 투쟁의 연속일지언정 시의 여백은 공존의 꿈을 품곤 합니다.

 

특별히 힘들 게 없었던 고3 생활.

그래도 수험생, 고3이란 단어가 뿜어내는 긴장감에 움츠러들 때, 세이머스 히니의 시집은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이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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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A



2년 전, 멀리 바다 건너 공부하러 떠났던 선배가 돌아왔다.
그녀의 귀환을 맞이하는 자리는 익숙한 반가움보다 '파티'라는 이국의 단어에서 드러나듯 조금은 생경한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6살 연하의 현지인 애인과의 결혼을 앞두고 잠시 귀국한 선배.
결혼식은 바다 건너 이국 땅에서 열리니 지인들과의 조촐한 자리를 마련한 것.
이제 학생을 넘어 이민자로, 그리고 평생의 동반자와 함께 가는 그 길이 늘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
ㅋㅋ 성공했어~ ^^;


K.J.Y & Her Son



새로 생긴 조카.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서 뉴페이스를 만나는 즐거움은 늘 새롭다.
주정뱅이 삼촌이라 조카 이름조차 가물거린다.
언젠가 이 녀석과도 술잔을 나눌 때도 오겠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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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다는 건...

길위에서 : 2007. 5. 12. 20:16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더군요.

그만큼 힘든 일이기도 하죠.

 

조금 먼 길을 돌아 이제서야 제가 가야 할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함께 늙어가는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이적의 새 앨범.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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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길위에서 : 2007. 5. 12. 08:05

명확히 보이던 길이 막다른 골목이 되어버리더군요.

 

대략난감.

 

소리 없는 아우성은 혼자 겪어야 할 몸부림이었습니다.

 

어차피 돌아오는 건 몸부림에 대한 메아리였을 뿐이니까요.

 

다시 돌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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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님이 그랬듯 어린 내게도 서울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니던 삼촌들과 고모는 집에 내려올 때마다 내게 갖가지 신기한 선물을 안겨주곤 했다. 아울러 명절에나 만날 수 있는 사촌누이들은 서귀포의 거리에서는 만나볼 수조차 없는 포스를 발산한 뒤 비행기를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곤 했다. 누이들이 탄 비행기를 바라보며 아마 서울은 저 구름 위에 지어진 도시일 것이라고 어린 나는 생각했었다.


유아원을 다니기도 전, 수술을 받기 위한 서울 방문이 내 기억의 첫 서울 방문으로 남아 있다. 아픈 기억보다 창경원의 원숭이와 각종 놀이기구가 신기했고, 이 강 이름을 아냐는 삼촌의 물음에 낙동강이라 대답했던 한강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다(물론 바다보다는 좁은 물이었지만 제주에는 강이 없다).

 

남산, 63빌딩, 롯데월드, 용산 전자상가, 명동, 종로, 한강 유람선. 막상 서울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이지만 대입 수험생이던 나와 친구들에게 서울은 두 다리의 힘을 쉬이 빼놓게 만드는 곳이었다. 바로 요 앞에 있을 것 같이 보이던 63빌딩을 향해 흑석동에서부터 무작정 두 다리에 의지해 걸아나서던 촌놈들. 전국민이 다 아는 곳에서는 쉬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름 공간적 아우라를 직접 겪어보고자 하는 촌놈들의 욕구가 강했던 시절이다.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의 규모에 놀랬고 시인의 이름만으로 그의 전집을 갖다주는 그 체계에 놀랐다. 정말 행복했던 공간은 역시 대학로. 수험생이라고 친지들이 챙겨준 용돈을 그 거리에 쏟아부었다. 아, 수험생 시절에 서울에서 놀랄 일은 또 있었다. 스팀이 나오던 대학 강의실. 논술시험을 치를 때, 동내의를 챙겨입고 가라던 아버지의 말씀을 난 꼭 지켰다. 시험 당일 푹푹 틀어주는 스팀에 삐질삐질 흘린 땀이 기억에 남는다.

 

본격적인 서울 생활은 유람객 시절의 기대 이하였다. 좁은 하숙방과 낙후된 왕십리의 거리. 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나 옥탑방과 같은 특이한 주거공간과의 만남은 낯설고도 힘든 경험이었다. 향수병까지는 아니지만 삶의 여유가 그리웠다고나 할까. 수험생 때는 신기하기만 했던 만원전철에 짜증이 났고, 외출에서 돌아와 세수 할 때마다 확인할 수 있는 콧속 검은 때에 서울은 가난한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됐다.

 

백수가 되었노라는 내 이야기에 상가집에서 만난 선배와 동기는 지레 걱정부터 앞세운다. 직장생활과 결혼 그리고 그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돈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난 투명인간이었다. 물론 우리 나이에 걸맞는 관심사이니 자연스레 이야기의 소재가 그리 옮겨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미래는 짜여진 틀대로 되는게 아니다. 

 

위에서 바라본 자본주의는 아름답다고 했던가. 남산의 야경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래 거리의 세상은 녹록하다. 한 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서울의 공간처럼 사람들도 각자 한 치 여유 없이 살아가려 한다. 틈의 동의어가 약함처럼 들린다.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경쟁력과 생존이란 단어가 횡횡하듯 약육강식의 사회가 우리 마음 속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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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3가역에서 내려 낙원상가 뒷골목을 걷고 있었습니다.

 

3월, 봄의 시작이라 하기에는 아직 추운 날씨.

간만의 외출임에도 불구하고 잔뜩 움추린 어깨가 따뜻한 방 구석을 그립다 합니다.

 

앞에서 걸어오던 두 아주머니가 말을 붙입니다.

 

"저기요, 길 좀 물읍시다."

 

서울 생활이 10년째라지만 이렇게 낯 선 이가 길을 물을 때면 일단 두렵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서울특별시민이 된지 3개월 남짓.

제가 아는 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아는 선에서 친절히 길을 가르쳐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주머니가 다시 제게 말을 붙입니다.

 

"저기요. 이 근처 회사원이세요?"

 

처음에 느꼈던 두려움이 다시 엄습합니다.

이어지는 아주머니의 이야기.

 

"얼굴의 기가 아주 좋아요."

 

--;;;;;;;

백수의 얼굴 기가 좋을 수밖에요.

집에서 하루 다섯 끼의 식사량과 풍족한 취침을 즐기는 사람의 기가 나쁠 수 있을까요.

그저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쌩까고 제 갈 길을 갑니다.

 

'도를 아시나요'의 도나 길이나 같은 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역시 종로 뒷골목은 재미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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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 : 2007. 2. 8. 13:15

(출처 : 마린블루스 070126)


늦게 사무실에 나갔더니 안 선생님이 먹어보라며 초콜릿 하나를 주더군.

흠, 아직 발렌타인데이까지는 시간이 남았건만(사무실 내 소장님을 제외한 유일한 남직원이라~).

막상 초콜릿 포장을 뜯는데 들려오는 안 선생님의 발언.

"드셔 보세요. 누구는 썩은 담뱃재 맛이라고 하더라고요."

안 선생님이 전해준 초콜릿 맛은 진했다. 너무 진했다.

아니나다를까 이미 성게군을 쓰러뜨린 초콜릿이라는 걸 오늘 발견했다.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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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정책은 무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패했을 경우 날 선 비수가 되어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게 또한 정책이다.
 
창조력이 향후 국가성장동력임을 외치면서 정작 이를 위한 문화예술 인프라에는 인색한 게 현실이다. 콘텐츠 산업 육성을 떠들면서도 정작 플랫폼 사업과 같은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투자만 이루어지는 현실이란 것이지. 농작법 개량이나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은 전무한 채 농산물 유통에만 신경쓰면 농업 육성이 이루어진다는 식이지.
 
아무튼 지역 생활공간에서 직접적으로 지역 문화향유권 최일선에 있는 문화의집에 대한 문화관광부의 관료적이며 편의주의적 발상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자세한 내용은 : 문화의집 파행 지원 문화부 각성하라! - 컬쳐뉴스 참조
 
 

꼬랑지 - 사진 속 피켓 중 몇 개는 내 작품이란 소리지. 으하하! 고필샘, 지연샘, 연경샘, 혜진샘 외 문화의집 식구들 힘 내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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