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은 아버지 홍판서 앞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울부짖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적서 차별제가 신파의 한 장면으로 각색된 대목이다. 조선시대의 적서 차별제와 반상 계급제가 철폐되었다는 현대에도 엄연히 계급은 존재한다. 계급이란 말이 레디컬하다면 조금 순화해서 계층이라 부르도록 하자. 

계급과 마찬가지로 계층도 위계질서에 따라 갖추게 되는 문화자본이 다르다. 조선시대의 홍길동이 호부호형을 못한 것처럼, 계층에 따라서 호명되는 내용이 달리 나타나곤 한다. 호칭과 관련해서 가장 무난한 호칭은 누가 뭐래도 '선생님' 아니겠는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역사 교과서 논란에 전경련이 양 팔 걷고 나섰다. 대기업 집단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하는 '재벌'이나 '문어발'이라는 용어가 교과서 서술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관련기사). 한 술 더 떠, 아예 학교장과 방송작가들에게 경제교육까지 시키겠다고 나섰다. 현재 군 장성과 일선 교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시장경제 교육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관련기사).

고등학교에서 배운 경제 상식으로는 경제의 3주체는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가계다. 전경련은 3주체 중 기업을 대표하는 이익단체. 이익단체인 만큼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현 상황이 너무 일방적으로 기업주체가 독주하고 있는 형국이라 걱정스러울 뿐이다. 기업의 독주는 국가가 견제해야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국가가 기업의 독주를 독려하고 있는 판이 아닌가.

'재벌'은 엄연히 두산백과사전에 등재된 경제용어다(두산도 재벌로 분류된다). 사전에는 일종의 콘체른으로 '거대 자본을 가진 동족으로 이루어진 혈연체 기업체군'을 재벌이라 부른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위키피디아에도 'jaebeol'이란 단어로 등재돼 있다. 하물며 jaebeol이란 단어가 언급된 학술자료도 넘쳐난다. 영자신문들은 말 할 것도 없다. 세계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몇 안 되는 국산 전문용어 중 하나가 바로 재벌이다. 한국경제의 특성을 설명할 때 뺄 수 없는 핵심적인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글로벌화가 달리 글로벌이겠는가.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의 용어를 전국민이 애용하는 걸 장려하는 것도 모자라 교과서에서 빼달라는 게 전경련의 주장인 것이다. 그건 그만큼 재벌이란 호칭이 캥긴다는 뜻일 게다.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면 호칭을 부정할 게 아니라 스스로 캥기는 부분을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비록 용어의 형성사는 부정적이었지만 진정으로 떳떳한 용어가 될 수 있도록 호명 당한 이의 노력하는 자세. 그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자신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씯고자 한다면, 진정으로 사회에서 인정받을 일을 해야 한다. 탑다운 방식의 교육 확대안을 내놓는 걸 보면 아직도 재벌의 버릇을 못 버린 것이다. 더욱이 이번 교육 확대안에선 학교와 방송국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을 겨냥했다는 점이 심각하다. 낙하산 인사를 통한 하드웨어 교체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소프트웨어까지 제공하겠다고 취지다. 교과서 논쟁과 같은 치열한 상징자본의 싸움과 그 측면에서 벌어지는 전경련의 교육 사업. 교육계와 방송계에 대한 자본의 편승전략은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결국 공영방송을 공영방송이라 못 부를 때가 되면 재벌을 진정 재벌이라 부르지 못하는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불행한 사실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홍길동은 호부호형을 허하지 않는 이땅을 떠났지만, 내겐 그렇게 옮겨갈 율도국조차 없단 사실이 암울할 뿐이다.
Posted by 망명객
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장시복, 책세상문고(우리시대)80, 20040425

지난 3월 1일, MBC가 공전의 히트작이었던 ‘대장금’의 후속작으로 준비했던 특별기획드라마 ‘영웅시대’가 70회를 마지막으로 조기 종영했다. “시련과 영광의 대한민국 경제사, 그 불모지대에서 기적과 전설을 일으켰던 주역들의 불꽃같았던 삶의 조명”을 목적으로 기획되었던 이 드라마는 ‘현대’와 ‘삼성’ 두 재벌 기업의 창업자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이유로 방영 전부터 큰 화제가 되었다. MBC는 ‘영웅시대’의 방영을 앞두고 ‘아이러브-MBC' 리서치 회원 35000명을 대상으로 국내 분야별 영웅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응답자 절반 이상인 1062명의 응답(52%)으로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경제 분야 영웅’으로 뽑혔다. 이미 정 회장의 경우 2001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국내 대기업 경영자 중 가장 호감 있고 존경할만한 경영자로 뽑혔었고 2003년과 2004년에는 삼성 이건희 회장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굳이 ‘영웅시대’라는 드라마 제목이 아니더라도 재벌은 이미 우리시대 존경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위 설문조사에서 알 수 있다.

2005년 5월 2일, 이 날을 주목하는 주요 이유는 대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경영인 1위에 뽑혔던 삼성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에서 큰 봉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의 명예 철학박사 학위 수여식 과정에 빚어진 학생들의 비판과 행사 저지로 인한 갈등은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2005년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 사건 직후 재계와 관계에서는 국민들의 ‘반기업정서’를 걱정했으며 언론에서는 대학생들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따끔한 훈계를 잊지 않았다. 5년 전 같은 고려대에서 있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특강 저지 사건에 반해 이번 사건의 학생들에게는 역풍이나 다름없었다. 

2005년 5월 16일 중소기업인대회에서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대통령의 이야기는 경제 권력 우위론을 일깨워주는 묘한 울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대통령이 지난 고려대 사건 하나만 두고 행한 발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삼성의 사장을 지냈던 장관을 두고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 대사로 뒀으며 이건희 회장이 지배하는 삼성이 한국 전체 수출액에서 주식시장 시가총액에 이르기까지 20% 이상의 몫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반추하며 나온 발언이었을 것이다. 즉, 대통령의 이야기는 세간의 담론으로 떠돌던 ‘삼성 공화국’, ‘삼성 왕국’을 대표로 한 재벌왕국이 우리 주변에 엄연히 존재하던 하나의 세계였음을 공표한 것에 불과하다.

고려대 사건의 상징성은 바로 이러한 경제 권력으로 존재하는 재벌과, “재벌의, 재벌에 의한, 재벌을 위한 한국경제”의 현실 속에서 자본의 문화적 패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정치적인 개혁․진보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히 노조 탄압에서부터 상속세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각종 설문조사 결과에서 볼 수 있듯 존경받는 경영자이며 ‘세계적 일류 기업’을 탄생시킨 ‘영웅’이다. 이게 삼성 자본의 문화적 패권이고 고려대 학생들은 이 패권에 도전했던 것이다.이건희 회장의 고려대 사건은 각종 외압설에 시달리며 조기 종영으로 끝난 드라마 ‘영웅시대’와 함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다.

국내 재벌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제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초국적기업은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본국의 기반을 바탕으로 자본 축적을 세계적 규모에서 수행하며, 이러한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과 조직을 갖고 있는 기업'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를 토대로 우리는 초국적기업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구체화해나갈 수 있다. 우선 초국적기업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산물로 규모가 상당히 거대하다. 초국적기업은 거의 예외 없이 한 나라에서 대기업을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세계적인 확장을 꾀했다. 이것은 초국적기업이 오랜 기간에 걸친 복잡한 자본 집적과 집중의 산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초국적기업의 활동을 포착할 때는 거대한 초국적기업의 세계적 독과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초국적기업이 한 나라에서의 독과점을 통해 얻은 거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자본 축적에 나선다는 것은 다른 나라 초국적기업과 경쟁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경쟁 속에서 결국 거대한 초국적기업 사이의 독과점이 세계적으로 형성된다. 세계적 자본 축적 과정은 소수의 초국적기업 사이의 경쟁과 협력을 통해 진행되며 이에 따라 세계적인 자본 집적과 집중은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초국적기업은 세계적인 활동을 전개하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전략과 조직을 보유한다.
초국적기업이 거대한 규모로 전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세계적 기업 조직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한다. 초국적기업은 세계적 시야에서 개발․조달․생산․판매의 효율화를 꾀해야 하며 세계적 경쟁의 압력은 초국적기업을 단일한 전략과 구조를 가진 '세계적 기업'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런데 초국적기업의 확장 과정은 매우 불균등하며 위계화되어 있다. 초국적기업의 자본 축적은 이윤을 높일 수 있는 조건에 영향을 받고 국민국가의 자본 축적 기반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불균등하고, 선진국과 후진국에서 자본 축적 전략이 위계화된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오늘날 세계적 자본 축적을 하는 기업을 일컬을 때 '다국적기업'이라는 용어보다 '초국적기업'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
다국적기업은 여러 나라에 걸쳐 활동하는 기업이라는 평면적인 의미만을 전달하지만 초국적기업은 '본국의 기반을 넘어서서' 세계적인 자본 축적을 하는 기업이라는 의미를 띠기 때문에 좀더 입체적인 정의를 보여줄 수 있다.

네 번째, 우리가 사용하는 초국적기업이라는 용어는 국민국가를 완전히 벗어난 자본의 세계적 축적 과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본국의 기반을 완전히 무시한 초국적기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초국적기업의 발전 과정은 국민국가의 자본 축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한편 초국적기업의 발전 과정은 국민국가의 자본 축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한편 초국적기업은 본국의 자본 축적 과정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초국적기업은 국민국가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국내 기반의 강점과 약점, 자국 정부의 도움이 초국적기업의 전략과 경쟁력을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더욱이 초국적기업은 국내 계급 투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초국적기업의 세계적 자본 축적은 자본이 진출한 국가의 기반을 전혀 무시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초국적기업의 자본 축적은 자본 전출 국가의 자본 축적과 계급 투쟁의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국적기업을 자본 축적 과정의 세계적 확장으로 파악하게 되며 노동의 세계적 통일과 분열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자본의 정의에서 보았듯이 자본은 산 노동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초국적기업은 어느 곳에 가든 노동과 마주해야만 한다. 따라서 초국적기업이 세계적으로 자본 축적을 확대하는 과정은 노동의 통합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곧 더 많은 노동자들이 소수의 손아귀에 집중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초국적기업은 불균등하고 위계화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단결을 약화시키고 분할․지배하는 전략을 구사하며, 이에 따라 노동은 분열한다. 따라서 초국적기업의 세계적 확장은 노동자들의 단결을 강화할 수 있는 조건과 약화할 수 있는 조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pp41-44.

IMF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에 성공한 재벌사들은 세계적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리한 구조조정은 중산층 신화의 붕괴로 이어졌고, 이에 따른 빈부격차의 증대가 오늘날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국내 재벌사는 초국적기업으로 부를 수 있다. 국민국가의 자본 축적을 토대로 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필연의 왕국으로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책세상문고... 상세보기
장시복 지음 | 책세상 펴냄
초국적기업에 대한 비판서. 제 1 장은 다국적기업 이라고 하지 않고 왜 초국적기업 이라고 했는지에...밝히면서 현실에 맞는 정의를 내려 보고, 제 2 장은 초국적기업의 일상사와 노동의 일상사에 대해다루며,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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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