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 부대의 슬픔
나는 여성주의나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무식으로 일관하는 편이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태생적 한계를 핑계로 내세우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구차한 변명일 뿐이겠지. 그래도 몇 자 끄적이는 이유는 상식을 넘어선 발언들이 난무하는 현실을 개탄하기 위해서다.
어청수 경찰청장이 "어린아이를 이용해서 위험한 시위현장에 데리고 나온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촛불집회에 참석한 '유모차 부대'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기사에서 언급된 인용이 정확한지의 여부는 논외로 치고, 이 문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손보자면 "어린아이를 위험한 시위현장에 데리고 나온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도로 고칠 수 있일 것이다. 여기서 굳이 말꼬투리를 잡는 이유는 어린아이를 이용했다고 밝힌 점이다. 어느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이용할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어 청장의 언술에 잠깐 놀라는 표정 한번 지어주자.
그리고 위 기사에서는 어청수 청장을 띄워주려는 조연배우가 등장한다. "아동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시위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데 대해 아동 학대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한나라당 이범래 의원이 바로 그다. 법학을 전공하고 이명박후보캠프 법률지원본부장을 거친 분 답게 그의 뛰어난 법리 적용 능력은 대한민국 아동의 인권 보호에 까지 닿아있다.
그러나 잠깐 돌려서 생각해보자. 법리라는 것도 결국은 현실을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좀 더 짱구를 굴려볼 필요가 있다. 왜 유모차 부대가 생겨났는지에 대한 근본적 원인을 되물어 봐야 하는 것이다. 왜 일부 여성들이 유모차를 끌고 위험하다는 시위현장에 나오게 된 것일까. 유모차 끄는 게 재미있어서? 만일의 사태에 아이를 핑계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서? 시사인 표지에 실렸던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란 문장을 돌려서 말하자면 '바보야, 문제는 육아야!' 정도가 될 것이다.
출산율 저하의 시대, 우리 엄마들의 한숨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간다. 축복 속에 태어난 생명을 돌보는 일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돈을 요구한다. 맞벌이 가정이 늘어난 만큼 믿을 수 있는 탁아시설이나 육아시설이 늘었을까? 여기에 여성 비정규직 문제까지 끌어들인다면 우리 엄마들의 한숨으로 이 땅이 정말 꺼질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어청수 경찰청장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위험한 시위현장이란다. 위험한 시위현장을 조장하고 방조한 경찰청장이라니. 어서 옷 벗고 물러나시기 바란다. 위험의 발화점은 시각 차가 있으므로 그냥 넘어가겠다. 대한민국 엄마들이 육아와 사회참여란 두 마리 토끼를 쫓다 만난 게 '유모차 부대'다. 그렇게 유모차 부대가 못마땅 했으면, 일선 경찰서나 파출소에서 시위에 참가한 엄마들을 위해 임시 탁아소라도 운영했어야 하는 게 논리적 수순이 아닐까. 결국 아동 인권도 국가기구인 경찰이 책임을 졌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건 아동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여성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육아의 굴레에서 집회·시위 참여의 자유도 누리지 못하는 대한민국 엄마들은 그래서 슬프다.
- 참고로 이범래 의원 홈페이지는 트래픽 초과로 접속이 원할치 않다. 오히려 이범래 의원이 바라는 것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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