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 시험을 처음 치른 건 대학 3학년이 끝나갈 시점이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후배 따라 강남의 어느 거리에서 토익 응시원서를 작성했던 게 지난 세기 말. 토익이란 게 뭔지 경험삼아 쳐 봤다지만, 사전지식이 전무했던 관계로 수험표와 함께 컴퓨터용 사인펜 두 자루만 달랑 들고 고사장에 들어섰다.

감독관 왈, "본 시험 답안 표기는 연필이나 샤프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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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용 사인펜이 아니라 연필이나 샤프를 이용하라니 낭패였다. 다행히 앞자리에 앉은 분께 연필 한 자루를 얻어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성적? 난 지난 세기에 치른 첫 토익 성적을 잊지 않을 만큼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다. 다만 토익성적 800점 대 이상이면 무난히 취업을 할 수 있었고, 900점 대는 신의 경지였다는 정도는 기억한다.

21세기가 됐다. 토익만으로는 모자란지 각종 자격 시험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한국어능력시험, 한자능력시험, 텝스, 한국사시험, MOS 등등... 각종 자격시험 대비 강좌 안내 포스터가 대자보를 대신해 캠퍼스를 뒤덮었다.

오늘, OPIc(오픽)이란 영어시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복학생 후배에게 물어보니, 영어구술시험 비슷한 건데, 삼성 입사시험에 반영된다고 요즘 많이들 보고 있는 시험이란다. 응시료가 7만원이 넘는 시험이다.

토익 900 중반 이상, MOS 취득, 한자자격시험 2급 등 후배들의 현란한 스팩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아득해진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한 것일까. 4년치 대학 등록금에 각종 자격 취득비용까지, 대학생이 봉인 세상이 된 건 아닐까.

이런 세상에 독서 자격증이 생긴다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을 듯 하다. 독서 유무와는 상관없이 책 한 권 구입시, 책 한 권 대출할 때마다 개인별로 포인트를 적립해 독서 자격증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책이 좀 팔리는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책 읽는 사회가 아니라 책이 팔리는 사회 말이다. (장르별 안배까지 고려한다면 머리가 복잡해지니 일단 여기서 접자) 어차피 토익 900 이상의 영어 벙어리들이 양산되고, PPT 하나 제대로 만들 줄 모르는 MOS 자격증 소지자들이 늘어나는 판국에 독서자격증 같은 얼치기 자격증 하나 생긴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으리라.

공교육 강화를 아무리 외친들, 각종 자격 시험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선 관련 사교육 시장이 커질 수밖에 없다.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대학 졸업을 앞둔 산업예비군들은 초조하다. 단기속성 특강이 버젓이 횡횡하는 캠퍼스, 실용은 곧 돈이다. 등록금으로는 전공 수업을 듣고, 각종 자격시험은 개인 주머니에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그래서 취업은 돈이다.



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