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7.21 이 비 뒤에 by 망명객
  2. 2007.08.03 배고픈 다리 by 망명객
  3. 2007.06.21 비가 내리면 by 망명객

이 비 뒤에

길위에서 : 2008. 7. 21. 02:48

이 산하의 여름은 늘 비와 함께 시작한다. 태양이 본격적으로 내리쬐기 전, 이 땅을 충분히 적셔두는 게 자연의 순리이다. 비는 도시보다 한적한 시골의 풍치를 더욱 또렷이 비춰준다. 비 내리는 날의 도시와 시골의 차이는 단순히 시각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 내리는 도시의 거리는 낮게 깔린 매연과 빽빽이 들어찬 우산숲으로 삶을 더욱 지치게 만들고, 늦은 밤 창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는 불면의 둔탁함만을 안겨준다. 하지만 시골에선 비 냄새와 그 소리마저 상쾌하다. 부침개를 부치는 기름 냄새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어린 시절, 비 내리는 날의 숲속은 내겐 큰 두려움이었다. 낮게 깔린 구름은 짙은 녹음 아래 긴 어둠의 터널을 만들곤 한다. 마치 전설 속 괴물의 아가리 마냥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그런 어둠의 터널 말이다. 표고버섯 농장을 하시던 아버지는 비가 내리는 날에도 그 어둠 속으로 선선히 들어가셨다. 난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사라지기 전까지 응시하며 무사히 돌아오시라는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어둠 속에서 나타나셨다.

이 빗줄기 아래 숲의 어둠 속에서도 생명은 자란다. 균류의 특성을 지닌 버섯은 특히 빗줄기 아래에서 그 성장주기가 짧아진다. 쉬이 웃자라기에 여름 표고버섯은 상품가치가 떨어진다. 그렇다고 우기의 숲이 실망만 안겨주는 건 아니다. 그 어둠의 구석구석에서 화려한 생명들이 습기를 머금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동충하초를 비롯한 각종 버섯류는 여름으로 접어드는 우기에 보물처럼 솟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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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숲 속에서 화려함을 뽐내는 버섯들은 대개가 독버섯이다. 비록 독을 품었기로서니 이들은 그 색의 다양함으로 녹빛 숲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약용 버섯으로 동충하초의 색은 그 자체가 경이롭다. 죽은 곤충의 몸을 빌어 태어나는 동충하초를 통해 생명의 순환을 읽는다. 기생의 치졸함이나 영생의 욕망은 순환이란 본질 앞에선 그저 연약하고 초라한 나신을 드러낼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충하초 - 040721 한라산>

더이상 숲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우기의 버섯처럼 내가 갑자기 웃자랐다는 건 아니다. 어둠의 숲으로 들어선 7월, 그 옛날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나도 이젠 시나브로 어둠을 응시할 나이가 되었다. 눈 앞에 펼쳐진, 어둠과 녹음으로 구분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나만의 보물을 찾고 독과 약을 구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비 뒤, 곰비임비 산적한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것부터 시작이다. 이 꼬여버린 삶을 바로 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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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

배고픈 다리

길위에서 : 2007. 8. 3. 14:55

창문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맹렬하다. 한낮인데도 초저녁처럼 어두운 교실에서 우리는 국민학교 저학년 학생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하교 후 집에서의 점심식사를 놓치고 있었다. 교실에 비치된 텔레비전에서는 어린이용 영화가 방송되고 있었고, 담임 선생님은 그 옆 의자에서 졸고 계셨다. 창 밖 세상은 온통 물세계이건만, 창 안에선 덤으로 주어진 교실 체류 시간에 따분함만이 넘쳐났다.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의 두 눈은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박혔고, 뒷자리의 아이들은 시덥잖은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한 편의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으며 잡담에 참가하는 아이들의 대오는 서서히 앞자리로 몰려오고 있었다. 빗소리가 잦아들며 그의 반비례로 커가는 교실 내 소음은 언제 담임 선생님의 낮잠을 깨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덤으로 주어진 시간이지만 교실이란 공간은 엄연히 질서의 공간이지 않겠는가. 괜히 선생님의 심기를 건들여서 치도곤이나 당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다행히 한 편의 영화가 끝나기 전, 교내 방송으로 하교령이 떨어졌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저학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졸다 깨신 선생님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라는 의례적인 이야기를 우리들의 뒷통수에 날리셨다. 참, 그렇게 집으로 달려가는 우리들을 선생님 곁에서 바라보던 몇몇 아이들이 있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사는 아랫마을이 아닌 윗마을의 아이들이었다. 선생님 곁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그 아이들의 눈빛은 국민학교 저학년생으로서 내가 기억하는 최초이자 마지막 우울함이다.

 

그 다음날도 우리는 제때 하교하지 못했다. 또 다른 영화가 방송되었고 잡담은 계속 이어졌다. 교실 앞 문이 열리고 우리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6학년 학생 둘과 담임 선생님이 함께 교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끊기지 않을 것 같던 잡담이 멈추었다. 6학년 선배들이 손에는 하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어제 우리 옆 반 친구가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다가 급류에 휘말려 죽었어요."

 

국민학교 저학년에게 최초의 죽음은 그렇게 다가왔다.

 

윗마을로 가는 길에는 배고픈 다리가 있었다. 평상시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에 교각을 세우지 않고 양 편의 도로를 하천의 단면을 따라 시멘트로 발라 이어주던 간의 다리를 우리는 배고픈 다리라 불렀다. 주린 배처럼 홀쭉하다해서 배고픈 다리였다.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봄가을 소풍을 갔고, 그 다리 근처에서 올챙이나 개구리를 잡거나 멱을 감기도 했다. 옆 반의 친구는 그 다리를 건너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배고픈 다리는 몇몇 죽음을 앗아갔다. 그렇게 하얀 상자가 모금함으로 돌고나면 곧 방학이었다. 다시 배고픈 다리 근처에서 우리는 멱을 감았고, 봄가을에는 그 다리를 건너 소풍을 갔다.

 

지금은 배고픈 다리를 찾을 수 없다. 그 자리에는 꽤 튼튼한 다리가 지어졌으며, 다리의 튼튼함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 너머 윗마을에는 국내 굴지의 IT회사가 들어섰다.

 

가끔 창문을 때리는 굵은 빗소리를 들을 때면 그때의 배고픈 다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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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

비가 내리면

길위에서 : 2007. 6. 21. 21:06

현식 형은 특유의 텁텁한 목소리로 비가 내리면 당신을 생각한다고 노래했다. 수봉 누나도 비가 오면 그때 그 사람을 떠올린다. 그 외에도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비롯, 내리는 비를 슬픔의 눈물에 빗댄 가사와 시들은 넘쳐난다. 

비와 그리움의 사이 만큼 비와 파전의 관계도 상당히 공고해 보인다. 아무리 그리움에 사무치더라도 결국 인간은 먹고 살자고 태어난 존재. 내리는 비 만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도 고픈 배는 어쩔 수 없다. 설상가상 귀찮음과 식재료의 모자람과 같은 극한의 상황이라면? 결국 이 땅 위, 그리움에 사무친 장삼이사들은 비 내리는 날 그리움을 곱씹으며 파전을 붙여먹었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여기에 막걸리가 더해진다면 더할나위 없는 완벽한 3박자의 조화. 실내 습기 제거를 위해 구들을 때야 할 일도 없고, 음주주정과 일정 거리를 두고 있어 막걸리를 입에 댈 일도 없지만 내일 장보기는 파전 재료에 맞춰서...

반죽만 만들어두면 며칠 동안은 큰 무리 없이 즐길 수 있는 식사 겸 반찬이지 않겠는가.

비가 내리고~ 배가 고프면~ 파전이나~ 붙여먹자~ 즐~~

 

2007년 장마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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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