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하의 여름은 늘 비와 함께 시작한다. 태양이 본격적으로 내리쬐기 전, 이 땅을 충분히 적셔두는 게 자연의 순리이다. 비는 도시보다 한적한 시골의 풍치를 더욱 또렷이 비춰준다. 비 내리는 날의 도시와 시골의 차이는 단순히 시각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 내리는 도시의 거리는 낮게 깔린 매연과 빽빽이 들어찬 우산숲으로 삶을 더욱 지치게 만들고, 늦은 밤 창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는 불면의 둔탁함만을 안겨준다. 하지만 시골에선 비 냄새와 그 소리마저 상쾌하다. 부침개를 부치는 기름 냄새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어린 시절, 비 내리는 날의 숲속은 내겐 큰 두려움이었다. 낮게 깔린 구름은 짙은 녹음 아래 긴 어둠의 터널을 만들곤 한다. 마치 전설 속 괴물의 아가리 마냥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그런 어둠의 터널 말이다. 표고버섯 농장을 하시던 아버지는 비가 내리는 날에도 그 어둠 속으로 선선히 들어가셨다. 난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사라지기 전까지 응시하며 무사히 돌아오시라는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어둠 속에서 나타나셨다.
이 빗줄기 아래 숲의 어둠 속에서도 생명은 자란다. 균류의 특성을 지닌 버섯은 특히 빗줄기 아래에서 그 성장주기가 짧아진다. 쉬이 웃자라기에 여름 표고버섯은 상품가치가 떨어진다. 그렇다고 우기의 숲이 실망만 안겨주는 건 아니다. 그 어둠의 구석구석에서 화려한 생명들이 습기를 머금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동충하초를 비롯한 각종 버섯류는 여름으로 접어드는 우기에 보물처럼 솟아난다.
초록의 숲 속에서 화려함을 뽐내는 버섯들은 대개가 독버섯이다. 비록 독을 품었기로서니 이들은 그 색의 다양함으로 녹빛 숲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약용 버섯으로 동충하초의 색은 그 자체가 경이롭다. 죽은 곤충의 몸을 빌어 태어나는 동충하초를 통해 생명의 순환을 읽는다. 기생의 치졸함이나 영생의 욕망은 순환이란 본질 앞에선 그저 연약하고 초라한 나신을 드러낼 뿐이다.
<동충하초 - 040721 한라산>
이 비 뒤, 곰비임비 산적한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것부터 시작이다. 이 꼬여버린 삶을 바로 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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