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7.28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 by 망명객
  2. 2009.06.10 망명객의 시국선언 by 망명객
  3. 2008.06.30 환영 by 망명객
짜증나는 과거는 잊으면 그만이다. 어차피 선택적 기억만이 남을 뿐이다. 사람? 인연의 고리도 쉽게 끊을 수 있다. 연락 끊고 지내면 그만이다. 어차피 먹고살기 바쁜 세상, 시간이 약이다.

가해의 상처를 덮는 데 필요한 건 피해의 기억이다. 넌 나를 이용했기에 난 너를 버릴 수밖에 없었어. 세상의 관계는 결국 상처를 주고받는 것임에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자기변명만 존재하는 상황. 결국 그 자리에 소통은 없다. 끝없이 소통을 이야기하지만 상처에 대한 두려움에 우린 스스로 단단한 껍질을 쌓을 수밖에 없다.

때린 놈은 발 뻗고 잘 수 없지만 맞은 놈은 발 뻗고 잔다는 어머니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에 기반한 독단적 관계 설정은 늘 인연의 고리 속에서 자신을 고립시킨다. 결국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선 가해자는 없고 모두 피해자인 셈이다. 적어도 그건 정신건강에 이롭다. 발 뻗고 편히 자려면...

개인에겐 양심이라도 있지만 집단에게 이를 요구하는 건 무리다. 조직 자체는 보수다. 영리 추구 여부는 상관 없다. 조직 결성 목적은 간 데 없고, 조직의 안위가 구성원들의 최고 가치가 된다. 대의를 위해 목숨 걸듯 조직의 안위를 걸고 행동한다 해도, 늘 조직 구성원들은 주판알을 튕기기 마련이다. 그 과정이 정치다.

사적 이익이 쉬이 공적 가치로 둔갑하는 요지경 같은 세상 속, 정치의 과잉이 빚어내는 풍경에 분노는 쉽지만 소외의 늪도 깊다. 좌와 우, 우리 편과 네 편으로 갈린 싸움은 선악의 프레임에 갖히게 되어 있다. 누가 맞았고 누가 덜 맞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를 지켜보는 입장에선 둘 다 같은 놈이란 거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이 사회엔 삶의 현장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넘쳐난다. 감히 각 구성원들이 주판알을 튕기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끼는 다급한 현장 말이다. 정치는 그런 현장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조직도 삶의 현장에 기반해야 한다. 상처받기 두려운 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짜증나는 과거는 잊으면 그만이지만, 반성 없는 망각은 미래의 재앙으로 내 목을 짓누르기 십상이다.

개인의 상처에는 시간이 약이지만, 정치를 내세운 조직에겐 소통만이 약이다. 때린 놈이나 맞은 놈이나 매한가지라는 관망자들의 평가가 그 어떤 논리보다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등 돌리는 관망자들이 늘어날수록 진보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아, 지금은 범민주주의 진영이라 이야기하자. 자신의 욕심을 위해선 온전한 시장가치마저 무시하는 그들에 비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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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

망명객의 시국선언

똥침 : 2009. 6. 10. 19:32
남녘 끝 제주대 교수도 "더 이상은 안된다" 시국선언 동참 (제주의소리, 20090609)


서울대부터 제주대까지 전국 대학가에서 시국선언이 쏟아져 나왔다. 서울대 총장은  동료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전체 서울대의 뜻이 아니라고 밝혔으며, 모 인사(아~ 이분의 이름을 잊어버렸기에 그냥 모 인사로 표한다)께선 선언문 내용이 특정 이념에 경도됐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가하기도 했다. 그분들은 국민들이 오해할 여지가 있다며 서설을 늘어놓았다.

오해? 매체 주체에 따라선 소수의 뜻이 다수의 의견처럼 포장될 수도 있다. 그 반대로 다수의 의견이 묵살될 수도 있다. 정보화 시대, 국민들이 거대 매체에 의존하던 시대가 끝나간다. 각 대학 교수들이 발표한 시국선언문 전문이 인터넷을 타고 전국으로 퍼진다. 몇 명의 교수가 시국선언에 동참했는지, 또 누가 선언문에 이름을 남겼는지, 우리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그 모든 걸 알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제주대에선 87년 6월 항쟁 이후 처음으로 발표된 시국선언문이란다. 87년 이후 대학가에서 몇 건의 시국선언문이 발표됐는지 난 잘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연이어진 대학가의 시국선언문 발표 뒤, 뿔난 국민들이 있다는 걸 난 잘 알고 있다. 망자의 넋을 추모하는 자리도 불허하고, 집회결사의 자유도 보장하지 않는 정부. 항의의 말문을 닫아놓으려는 정부. 통합은 커녕 민주주의의 기본도 모르는 정부. 난 이런 정부를 우리나라의 정부라고 인정할 수 없다.

"더 이상은 안된다"

참말이다. 째째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도 다양한 의견들을 조율하기 힘든 판국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막아놓다니... 그게 우리나라의 정부다. 그게 이 나라의 대통령이다. 어짜피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니 두고보자는 말은 말자.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은 행사하기 편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국민의 권력이다.

자유는 권력에 대한 제한이다. 난 그렇게 알고 있다. 현 정부는 개인의 정치적 자유와 사상적 자유란 불가침 영역을 침범하려 한다. 이런 상황에선 피지배자의 저항이나 반란은 정당하다.

날 반란자로 몰지 말라!


2009년 6월 10일
시청광장으로 향하며
망명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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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둡나?
우짰든, 시청에서 봅시다.





Posted by 망명객

환영

길위에서 : 2008. 6. 30. 19:26
그 새벽 그 거리에는 쏟아지는 빗줄기만큼 촛불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형형색색 우의들의 틈바구니에서 분노에 찬 구호와 함께 서 있던 너를 발견했다.
긴 머릿결에 대롱대롱 매달린 머리핀, 콧망울 끝에 걸쳐진 안경을 밀어올리는 네 손동작, 피곤한듯 더욱 창백히 무표정한 얼굴.
낯설면서도 전혀 변하지 않은 예전 모습 그대로 넌 그 거리에 있었다.

널 발견한 순간 솟구치던 반가움과 망설임의 간극은 저 너머 우주의 그것처럼 너무 넓었다.
"안녕! 잘 지내지?"
혀 끝에 맴돌던 그 몇 마디를 차마 난 꺼낼 수가 없었다.
널 발견했을 때 내 머릿속은 이미 풀지 못할 실타래처럼 엉켜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갑자기 들이닥친 조직화된 폭력을 피해 도망치느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거리에서의 우연한 만남.
그렇게 다시 헤어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내가 가는 곳마다 넌 그 자리에 있었다.
비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 근처에서, 바위처럼에 맞춰 율동하는 대학생들 옆에서, 지친 몸둥이들이 육신을 숨기던 골목에서, 전의경들을 피해 도망치던 인파 속에서 넌 늘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나비와 동지가가 울리던 동이 틀 무렵까지 난 네게 끝내 "안녕"이란 말 한마디를 꺼낼 수가 없었다.
비에 홀딱 젖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저 너의 안녕과 평안을 마음 속으로 빌 뿐이다.

살아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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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