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 치 틈도 없는 공간
동수님이 그랬듯 어린 내게도 서울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니던 삼촌들과 고모는 집에 내려올 때마다 내게 갖가지 신기한 선물을 안겨주곤 했다. 아울러 명절에나 만날 수 있는 사촌누이들은 서귀포의 거리에서는 만나볼 수조차 없는 포스를 발산한 뒤 비행기를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곤 했다. 누이들이 탄 비행기를 바라보며 아마 서울은 저 구름 위에 지어진 도시일 것이라고 어린 나는 생각했었다.
유아원을 다니기도 전, 수술을 받기 위한 서울 방문이 내 기억의 첫 서울 방문으로 남아 있다. 아픈 기억보다 창경원의 원숭이와 각종 놀이기구가 신기했고, 이 강 이름을 아냐는 삼촌의 물음에 낙동강이라 대답했던 한강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다(물론 바다보다는 좁은 물이었지만 제주에는 강이 없다).
남산, 63빌딩, 롯데월드, 용산 전자상가, 명동, 종로, 한강 유람선. 막상 서울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이지만 대입 수험생이던 나와 친구들에게 서울은 두 다리의 힘을 쉬이 빼놓게 만드는 곳이었다. 바로 요 앞에 있을 것 같이 보이던 63빌딩을 향해 흑석동에서부터 무작정 두 다리에 의지해 걸아나서던 촌놈들. 전국민이 다 아는 곳에서는 쉬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름 공간적 아우라를 직접 겪어보고자 하는 촌놈들의 욕구가 강했던 시절이다.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의 규모에 놀랬고 시인의 이름만으로 그의 전집을 갖다주는 그 체계에 놀랐다. 정말 행복했던 공간은 역시 대학로. 수험생이라고 친지들이 챙겨준 용돈을 그 거리에 쏟아부었다. 아, 수험생 시절에 서울에서 놀랄 일은 또 있었다. 스팀이 나오던 대학 강의실. 논술시험을 치를 때, 동내의를 챙겨입고 가라던 아버지의 말씀을 난 꼭 지켰다. 시험 당일 푹푹 틀어주는 스팀에 삐질삐질 흘린 땀이 기억에 남는다.
본격적인 서울 생활은 유람객 시절의 기대 이하였다. 좁은 하숙방과 낙후된 왕십리의 거리. 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나 옥탑방과 같은 특이한 주거공간과의 만남은 낯설고도 힘든 경험이었다. 향수병까지는 아니지만 삶의 여유가 그리웠다고나 할까. 수험생 때는 신기하기만 했던 만원전철에 짜증이 났고, 외출에서 돌아와 세수 할 때마다 확인할 수 있는 콧속 검은 때에 서울은 가난한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됐다.
백수가 되었노라는 내 이야기에 상가집에서 만난 선배와 동기는 지레 걱정부터 앞세운다. 직장생활과 결혼 그리고 그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돈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난 투명인간이었다. 물론 우리 나이에 걸맞는 관심사이니 자연스레 이야기의 소재가 그리 옮겨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미래는 짜여진 틀대로 되는게 아니다.
위에서 바라본 자본주의는 아름답다고 했던가. 남산의 야경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래 거리의 세상은 녹록하다. 한 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서울의 공간처럼 사람들도 각자 한 치 여유 없이 살아가려 한다. 틈의 동의어가 약함처럼 들린다.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경쟁력과 생존이란 단어가 횡횡하듯 약육강식의 사회가 우리 마음 속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길위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아온다는 건... (0) | 2007.05.12 |
---|---|
길... (0) | 2007.05.12 |
길을 물어보는 사람 (0) | 2007.03.12 |
드림카카오 (0) | 2007.02.08 |
문화의집 기자회견 (0) | 2006.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