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교과서 전쟁'은 기억의 공유화나 역사적 책임, 역사 교육과 같은 문제가 국가적·국제적인 논쟁의 대상의 되어 역사의 망령이 사회생활에 유례없는 규모로 얼굴을 들이민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역사가 헨리 레이놀즈(Henry Reynolds)는 "역사가 지금처럼 정치적 논의의 중심이 되고, 클리오(그리스 신화에서 역사를 관장하는 신)를 지금처럼 선뜻 불러들인 적이 과거에 언제 있었던가?"하고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 바 있다.(Reynolds 2000. 3) 이 말은 국가적 아이덴티티를 둘러싼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정치지도자가 점점 더 빈번하게 역사를 동원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사정을 두고 한 말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원주민(Aborigine)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관한 책임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미묘한 정치현안이 되고 있다.
기억의 공유화나 사죄, 역사적 책임이 정치적으로 돌출한 나라는 비단 오스트레일리아뿐만 아니다. 최근 체크와 독일의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저지른 잘못을 서로 사죄했으며, 노르웨이에서는 국왕이 국내의 소수민족(Saami)에 대한 처우를 사과했고, 뉴질랜드에서는 토지를 강탈당한 마오리(Maoris)에 대한 사죄문에 영국의 여왕이 서명을 했다. 또한 미국의 콜린 파웰(Colin Powell) 국무장관은 예전에 진두를 지휘했던 베트남을 다시 방문하여 밀라이(My Lai) 학살 같은 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성 논란에 불을 붙였고, 몇몇 미국의 정치가와 운동가들은 노예매매의 피해자 자손에게 보상하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단지 과거의 잘못에 대한 '국가의 죄'를 재단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Barkan 2000 참조) 과거는 다른 형태로도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다. 이제 막 21세기를 맞이한 동남아시아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굽이굽이 그려낸 영화가 붐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이웃나라와의 분쟁을 다룬 것이 인기를 모은다. 타이의 역사학자인 찬윗 카셋시리(Charnwit Kasetsiri)에 따르면 공식적인 학교교육에서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희박한 반면, 역사의식의 통속적 표현에 대해서는 국민적인 열광이 대단하다는 점은 기묘한 이분법이다. 제레미 바르메(Geremie Barme)도 1990년대 중국에서 "일반대중의 역사인식이 변화하는 데 명확한 영향을 준 것은" 역사 전문가인 학자가 아니라 "신문, 잡지, 텔레비전, 상업출판을 활동의 장으로 삼는 소설가, 저널리스트, 일부 학자"임을 지적했다.(Barme 1993, 265)
그렇다면 역사의 위기는 단지 건망증의 문제가 아니라 심오한 딜레마를 반영한다. 세계적인 규모의 이동과 함께 급속하게 변화하는 다양한 미디어 시대에 과거에 대한 지식을 세대에 걸쳐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현재의 삶을 과거의 사건과 어떻게 결부시킬 것인가? 과거의 어떤 부분을 자신의 과거라고 할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과거로 받아들일 것인가?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논쟁에서 자극을 받은 나는 위와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의 교과서 논쟁은 사죄와 역사수정주의를 둘러싼 세계 각지의 분쟁과 마찬가지로, 세대를 걸친 역사 지식의 전달 문제 및 그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역사적 책임의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전반적인 역사의 위기와 세계의 역사가들이 오늘날 당면한 도전에 대한 서술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일본의 교과서 논쟁에 대해 가볍게 논평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 우리 안의 과거, 19-21쪽
Posted by 망명객
홍길동은 아버지 홍판서 앞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울부짖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적서 차별제가 신파의 한 장면으로 각색된 대목이다. 조선시대의 적서 차별제와 반상 계급제가 철폐되었다는 현대에도 엄연히 계급은 존재한다. 계급이란 말이 레디컬하다면 조금 순화해서 계층이라 부르도록 하자. 

계급과 마찬가지로 계층도 위계질서에 따라 갖추게 되는 문화자본이 다르다. 조선시대의 홍길동이 호부호형을 못한 것처럼, 계층에 따라서 호명되는 내용이 달리 나타나곤 한다. 호칭과 관련해서 가장 무난한 호칭은 누가 뭐래도 '선생님' 아니겠는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역사 교과서 논란에 전경련이 양 팔 걷고 나섰다. 대기업 집단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하는 '재벌'이나 '문어발'이라는 용어가 교과서 서술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관련기사). 한 술 더 떠, 아예 학교장과 방송작가들에게 경제교육까지 시키겠다고 나섰다. 현재 군 장성과 일선 교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시장경제 교육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관련기사).

고등학교에서 배운 경제 상식으로는 경제의 3주체는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가계다. 전경련은 3주체 중 기업을 대표하는 이익단체. 이익단체인 만큼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현 상황이 너무 일방적으로 기업주체가 독주하고 있는 형국이라 걱정스러울 뿐이다. 기업의 독주는 국가가 견제해야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국가가 기업의 독주를 독려하고 있는 판이 아닌가.

'재벌'은 엄연히 두산백과사전에 등재된 경제용어다(두산도 재벌로 분류된다). 사전에는 일종의 콘체른으로 '거대 자본을 가진 동족으로 이루어진 혈연체 기업체군'을 재벌이라 부른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위키피디아에도 'jaebeol'이란 단어로 등재돼 있다. 하물며 jaebeol이란 단어가 언급된 학술자료도 넘쳐난다. 영자신문들은 말 할 것도 없다. 세계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몇 안 되는 국산 전문용어 중 하나가 바로 재벌이다. 한국경제의 특성을 설명할 때 뺄 수 없는 핵심적인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글로벌화가 달리 글로벌이겠는가.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의 용어를 전국민이 애용하는 걸 장려하는 것도 모자라 교과서에서 빼달라는 게 전경련의 주장인 것이다. 그건 그만큼 재벌이란 호칭이 캥긴다는 뜻일 게다.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면 호칭을 부정할 게 아니라 스스로 캥기는 부분을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비록 용어의 형성사는 부정적이었지만 진정으로 떳떳한 용어가 될 수 있도록 호명 당한 이의 노력하는 자세. 그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자신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씯고자 한다면, 진정으로 사회에서 인정받을 일을 해야 한다. 탑다운 방식의 교육 확대안을 내놓는 걸 보면 아직도 재벌의 버릇을 못 버린 것이다. 더욱이 이번 교육 확대안에선 학교와 방송국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을 겨냥했다는 점이 심각하다. 낙하산 인사를 통한 하드웨어 교체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소프트웨어까지 제공하겠다고 취지다. 교과서 논쟁과 같은 치열한 상징자본의 싸움과 그 측면에서 벌어지는 전경련의 교육 사업. 교육계와 방송계에 대한 자본의 편승전략은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결국 공영방송을 공영방송이라 못 부를 때가 되면 재벌을 진정 재벌이라 부르지 못하는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불행한 사실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홍길동은 호부호형을 허하지 않는 이땅을 떠났지만, 내겐 그렇게 옮겨갈 율도국조차 없단 사실이 암울할 뿐이다.
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