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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1 그림자... by 망명객

그림자...

보고읽고느끼고 : 2005. 1. 21. 13:24
『약속 없는 세대』, 윤후명, 세계사, 1990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내가 있다. 사내가 늘 찾는 건 눈 앞 가득한 푸르름. 신분이 불확실한 사내에게 시인이란 직함이 잘 어울리는 건 푸르름의 꿈을 찾아 도망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 대에 30대의 삶에 대해 구체적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어느 우익단체의 가두집회 현장 근처에서 말 걸어오던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처럼 난 지금 나이의 권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 20대가 되었을 땐 30대의 나 자신을 떠올릴 수 없었고 당장 내일의 내 모습조차 알 수 없었다. 하루하루의 불확실성을 즐기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불확실성을 즐길 수 있었던 건 지키고 싶은 무언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푸르름을 찾아 나선 시인은 결국 푸르름의 그림자만을 밟을 뿐이었다. 기사도 이상 수립을 위한 돈키호테의 모험이 한낱 그림자 밟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유신이 어땠고 10.26 사태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역사적 기억들이 각 개인의 존재와 강하게 중첩되어 있는 국민이 또 있을까.

폭압적 사회에서 낭만주의적 인물은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 종국에는 푸르름을 간직한 아내도 그의 곁을 떠나버리는 약속 없는 세대, 그래 당장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그에게 가족 또한 미래를 함께 담보할 수 없는 집단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야기처럼 외로움이란 병원체에는 항체가 없어서 면역이 되지 않기 때문이겠지. 우리는 그 외로움이 두려워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이 밟았던 푸르름의 그림자. 그래 그 그림자는 이제 죽었다. 타살인지 자실인지 알 순 없지만 어느 겨울 어느 산천에서 약속을 잃어버린 채 동사해 죽었단다. 슬픔? 모든 사물은 그림자를 갖고 살아간다. 그림자가 없는 사물은 유령일 뿐. 술픔을 느끼기 전에 공포를 느낀다.



책 표지 다음 장에는 이 책 첫 주인의 메모가 남겨져 있다.

만날수있었던인연이니까
헤어질수도있다는거지.
가끔씩이라도떠오를수있다는얼굴이니까
아주지우려구한다는거지.
가을에는그냥코스코스가피고진다는걸루만족하고싶다는거지
90.10.29

1990 년 어느 가을날 이 메모를 남긴 이는 오늘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의 희망처럼 아주 지우려던 얼굴을 잊고 잘 살고 있을까? 아니면 해마다 피어나는 코스모스를 보며 불쑥 지우려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까? 현재의 그에게 그림자가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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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