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과 같은 연말이면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곤 한다. 이룬 것 없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은 가끔 슬픔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멈춘다고 해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키며 마음껏 웃을 수 있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내게는 나름대로의 위안이다.
차 한 잔이 생각나면 찾게 되는 공간이 있다. 이십여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늘 그 자리를 지킨 드뷔시 산장이 그곳이다. 물론 내가 이곳을 다니기 시작한 건 겨우 10년 전이다. 겨우 10년 전 말이다. 몇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그 내부도 조금 변하긴 했지만 아직 내게 드뷔시 산장은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빼곡히 벽면을 채운 낙서들은 수많은 이들의 사연을 담고 있다. 사랑했고 미안했던 이야기들이 벽면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잇는 것이다. 몇몇 지인들이 활동했던 '인문대신문사' 또한 아직도 자신의 자리에서 그 이름을 지키고 있다. 사라진 왕조의 욕된 유물(?) 같은 명칭을 확인한 뒤 주변을 살펴보니 몇몇 지인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다.
사진 가운데 모자이크 처리한 부분은 이 쓰잘데 없는 블로그를 찾아오는 모 지인의 이름이다. 그는 현재 유부남이다. 하트를 사이에 두고 현 유부남의 이름과 누구인지 알 수 없는 1인칭 '나'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의 주인공이 현 유부남의 부인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사랑했고 미안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벽면 위에 남아 있다. 시간은 흘렀고 당시의 감정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에선 낙서를 남기던 시점의 감정이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가 되어 흐른다. 유통기한이 말소되어버린 이야기가 가득 찬 공간에서 난 따듯한 핫초코 한 잔 마시며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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