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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새 전직 대통령을 두 명이나 잃었다. '잃어버린 10년'이란 정치적 수사가 지난 10년의 세월을 저주처럼 지워버리는 듯하다.

조부 세대인 김대중 대통령과 아버지 세대인 노무현 대통령의 잇따른 집권은 지난 반 세기의 정치가 외면해왔던 분배의 정치가 이뤄지던 시기였다. 물론 분배의 정치는 제도적 한계 내에서 이뤄진 개혁이었고 그 속도는 더뎠다. 시장의 투명성을 강조한 자유주의적 개혁이었다. 이를 두고 좌파 정책이란 색깔론 공세가 만만치 않았던 건 그만큼 권위주의적 정경언 유착의 고리가 견고했단 걸 의미하겠지.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거리 위 사람들의 표정은 아득했다. 단, 두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표정에는 비교적 큰 차이가 나타났다. 마치 어머니를 잃어버린 듯한 격정이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그보다는 덜한 차분함이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 기간을 메웠다. 거리에서 난 조부의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을 느꼈다.

정치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하진 않았지만 그가 내게 남긴 두 가지 감동을 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92년 정계 은퇴 후 출간한 그의 자서전과 지난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보여준 그의 눈물이다. 노무현의 눈물 못지 않게 김대중의 눈물은 무게감이 컸다. 내겐 그 눈물이 정치적 동반자를 잃은 슬픔의 표현보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으로 읽혔다.

모든 부모세대는 극복 대상이지만 조부세대는 쉬이 신화와 존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대한민국의 기쁨이면서 슬픔이기도 한 사실은 조부 시대에 이뤘어야 할 신화와 부모 세대의 한계가 지난 10년 동안 압축적으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그게 저들의 '잃어버린 10년'이란 허구적 수사의 실체다.

추모 시민문화제, 김대중 대통령의 인간됨을 되새기며 자신의 모자람을 시인하는 이들을 뒤로 한 채 난 지인과 함께 술잔을 나눴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에도 '사퇴하지 않는 민중후보'를 주장하던 이들과 함께, 그래도 '창'보다는 낫지 않겠냐며, 씁쓸한 술잔을 나누던 기억이 떠올랐다. 김대중 대통령의 눈물과 노무현 대통령의 눈물이 술잔 위에 아롱진다.

한국사회에서 성인 남성이 대중 앞에 눈물을 보인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눈물. 아픔과 슬픔을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을 지닌 대통령이 있었다는 건 우리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잘 가세요, 김대중 대통령. 소주가 참 입에 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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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