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며칠 전 모든 일기예보가 일제히 장마시즌의 시작을 선언했다. 파전과 동동주의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동안 벼르던 부침개를 부쳤다. 종목은 부추부침개.

 

밀가루와 부침가루를 적당히 섞은 뒤 계란과 적당량의 물을 부어 기본 반죽을 만든다. 시장에서 사온 부추 한 단을 씻어 적당한 크기로 자른 뒤, 반죽에 넣어 섞는다. 소금과 다진 마늘은 대충 눈짐작으로 첨가한다. 물론 빨간고추와 새우 등 취향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첨가한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자취생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안된다. 설마 당신, 몇 큰 술이니, 몇 그램 따위의 레시피를 망명객에게 바란 건 아니겠지?

 

자, 부침개 기본 반죽이 마련되었으면 반죽 준비로 어지럽혀진 개수대와 싱크대를 치우자. 기름 냄새에 취한 뒤에는 뒷정리가 귀찮아지는 법이다. 뒷정리를 하는 동안 기름을 충분히 두른 후라이팬이 적당히 달구어 지기를 기다린다. 대략 개수대와 싱크대가 본래의 깨끗하고 깔금한 모습을 보일 때쯤이면 후라이팬은 충분히 달구어진 상태가 된다. 후라이팬 위로 적당한 양의 반죽을 올리고 모양을 잡는다. 누구는 부침개를 뒤집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지만 이것 마저도 개인의 취향이다. 망명객은 대개 텔레비전 뉴스 세네 꼭지 정도가 지난 뒤 부침개를 뒤집는다. 보통 부침개를 앞뒤로 세 번 뒤집고 나면 모든 공정이 끝난다.

 

양념장은 옵션이다. 반죽 과정에서 적당량의 소금으로 간을 맞춘 오늘의 부침개는 급작스런 귀찮음이 몰려옴에 따라 양념장 제작은 생략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빗소리를 들으며 맛있게 부침개를 먹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빗소리가 없다.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환경의 조성은 항상 픽션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질 비를 기대했건만, 샐러리맨의 신화와 구시대 공주님의 한 판 폭로전에 대한 뉴스보도만이 젓가락 사이를 휘젓는다.



#2.

 

빗소리, 부침개와 함께 삼박자를 이룰 적당한 대상을 골똘히 모색하고 있었다. 동동주를 대신할 그 무엇을... 그때 떠오른 게 가야금이었다.

 

겨우내 닫아두었던 창문. 밤바람을 타고 서툰 가야금 소리가 그 창을 넘어 들어온 건 봄이었다. 익숙한 민요가락을 몇 번의 끊김 끝에 이어가던 그 소리는 분명히 가야금이었다. 소리의 존재감을 눈치챌 때 나는 컴퓨터 앞에서 우주괴물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금새 그 낯선 소리에 홀려 우주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마 피아노 소리였거나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가락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기억에도 익숙한 가락들이 그 흐름 중간중간 끊기는 걸 보면 분명히 누군가가 직접 연주하는 소리였다.

 

대략 소리의 흐름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옆 집 창문에 시선이 걸린다. 옆 집 아낙이 가야금을 뜯고 있던 것이렸다. 그 뒤 간간이 밤바람 따라 미숙한 가야금 소리를 취미삼아 듣고 있다. 소극적인 감상이다. 이웃집 아낙네라 부르기엔 좀 그렇고, 그분에게 가야금처자라 개인적인 별명을 붙여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구할 길 없는 동동주를 대신해 빗소리, 부침개와 함께 삼중 앙상블을 이룰 대상으로 망명객은 이웃에 사는 가야금처자의 연주를 떠올렸다. 교류 없는 이웃이긴 하지만 간간이 가야금처자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기에... (막상 이렇게 글을 쓰고보니 음란퇴폐변태스토커 스토리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이웃사촌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잖아. 맛은 훌륭하지만 정량조절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얼렁뚱땅 망명객 레시피의 최대 단점을 이웃사랑의 실현으로 승화시키자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남은 반죽으로 부침개 하나를 부쳐 옆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옆 집 사람인데요" 무슨 용건인지 의아해하는 가야금처자의 얼굴 앞에 부침개 한 접시를 내밀었다. "아, 비도 내려서 부침개 한 번 부쳤는데, 반죽을 많이 만들어서요." 원래 꺼내려 한 멘트는 이게 아니었다. '옆 집 사람인데 이사와서 인사도 못드리고... (중략) ... 가야금 연주하시나 봐요. 연주 좀 부탁드려도 될런지' 어쨌든 의아한 표정의 가야금처자는 이내 웃으며 고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돌려주는 접시 위 자두 세 알을 얹어서 말이다.

 

부침개 여섯 판을 부쳤다. 그중 한 판은 가야금처자에게 건냈으니 홀로 부침개 다섯 판을 꾸역꾸역 먹은 것이다. 빗소리와 가야금 소리를 벗하며 부침개 젓가락 사이로 장마 중 풍류를 즐기고자 했으나 남은 건 입안 가득한 기름내 뿐이다. 아, 가야금처자가 돌려준 접시 위 자두 세 알. 올해 처음으로 자두를 먹어본다. 기름진 입이라 그 상큼함이 더욱 기억에 남을 자두.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다. 이웃과 친하게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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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