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아이와의 만남은 삶이 즐겁기만 해야 했던 대학 신입생 시절의 봄이었다. (조금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맺고 있는 인연의 대부분은 봄에 이루어진 인연이다). 수업의 선택과 출석의 자유가 낯설기만 한 그 시절에 우리는 누군가가 강제한 침묵이 무겁기만 한 철거촌이란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고만고만한 고민들이 쏟아지던 인연들과의 술자리로 이어졌다.
#2.
세기가 바뀌고도 꽤 오래 지나버린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는 다시 술자리를 이어갔다. 물론 토악질처럼 쏟아내던 고민은, 주제가 바뀌긴 했지만, 여전한 농담과 웃음처럼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한 편의 영화를 우리들에게 내놓았다.
#3.
대우자동차 파업과 해고. 해고 이후 사진촬영을 취미생활로 삼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의 뷰파인더에 개나리처럼 웃는 아내를 담고 싶어한다. 복직통보서를 받아들고 별거중인 아내를 찾아간 그는 아내의 얼굴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아내고, 어린 아들에게 피아노교본을 쥐어주려 한다. 복직하지 못한 동료들과의 술자리. 세상은 복직의 길이 즐겁고 행복한 길이라 의례 짐작하지만 복직하지 못한 동료들과 아직 병원에 누워있는 동료는 공장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발목을 무겁게 잡아끈다.
"씨발놈아, 나 너희들 다 잊고 잘 살거야, 잘 살거라구!"
"씨발, 근데 잘 산다는 놈 얼굴이 왜 그래?"
"......."
"잘 다녀, 이번엔 짤리지 말고... 형, 나중에 소주나 한잔 합시다."
#4.
"한 편의 멜로영화로 봐주세요."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 시간, 스크린 앞에 나온 그 아이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물론 그 아이다운 말이었고, 영화 상영 내내 불편함이란 바늘방석에 앉아 있던 나는 왜 멜로영화라 생각하는지 듣고 싶었다. 물론 답은 내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덧 학교라는 동물원을 탈출하긴 했지만 우리는 아직 새끼여우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5.
다시 술자리는 이어진다. 함께한 인연들은 여전했고 라면 한 그릇과 소주 대신에 와인과 치즈로 술자리의 종목이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음주 행태야 소주를 부어대던 그 버릇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말이다.
끝내 만들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는 그 아이의 이야기가 귀에 거슬린다. 그 이유도 내 자신에게 있겠지.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그렇게 강요된 삶을 살고 있기에. 그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