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되고 별이 되고 꽃이 되면서
강물이 되고 별이 되고 꽃이 되면서
신경림
강물이 어찌 오손도손 흐르기만 하랴
큰물이 작은 물을 이끌고
들판과 골짜기를 사이좋게 흐르기만 하랴
어떤땐 서로 치고 받고
또 어떤땐 작은 물이 큰물을 덮치면서
밀면서 밀리면서 쫓으면서 쫓기면서 때리고 맞으면서
시게전도 지나고 다리밑도 지나는
강물이 어찌 말없이 흐르기만 하랴
별들이 어찌 늘 조용히 빛나기만 하랴
작은 별들과 큰 별들이 서로 손잡고
웃고 있기만 하랴
때로는 서로 눈부라리고 다투고
아우성으로 노래로 삿대질로 대들고
그러다 떠밀려 뿔뿔이 흩어도 지지만
그 성난 얼굴들로 그 불뿜는 눈빛으로
더 찬란히 빛나는 별들이
어찌 서로 그윽히 바라보기만 하랴
산비알의 꽃들이 어찌 다소곳 피어 있기만 하랴
큰 꽃이라 해서 먼저 피고
작은 꽃이라 해서 쫓아 피기만 하랴
빛깔을 뽐내면서 향기를 시새면서
뒤엉켜 싸우고 할퀴고 허비고
같이 쓰러져 분해서 헐떡이다가도
세찬 비바람엔 어깨동무로 부둥켜 안고 버텨
들판을 산비알을 붉고 노란 춤으로 덮는
꽃들이 어찌 곱기만 하랴
산동네의 장바닥의 골목의 삶이 어찌 평화스럽기만 하랴
아귀다툼 악다구니가 잘 날이 없고
두발부리 뜸베질이 멎을 날이 없지만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엉켜
제 할일 하고 제 할말 하면서
따질 것은 따지고 밟을 것은 밟으면서
강물이 되고 별이 되고 꽃이 되면서
산동네의 장바닥의 골목의 삶이 어찌 밝기만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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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18이면 빛고을에 사는 친구가 떠오릅니다. '80광주'라는 ID를 사용하던 친구죠.
스무살 무렵, 그 친구와 저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고등학교와는 다른 대학사회, 신입생은 자기의 언어를 배우기보다 선배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담아내기에도 벅찬 존재였습니다. 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으며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는 과정들. 글쎄요,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전 음악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눴는지도 모릅니다. 서로에게 상처주기 싫은 마음에...
옛 일기를 들추듯, 손때 묻은 이 시집을 들출 때면 귀 끝이 화끈거리곤 합니다. 이제 스무살에서 열을 더해야 하는 나이. 이젠 연락조차 닿지 않는 그 친구는 어찌 살고 있으며, 저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요?
다시 5.18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반 년 앞두고 벌써부터 텔레비전 브라운관에는 헛된 만남과 거짓 웃음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언어의 칼날을 쉬이 휘두르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러한 칼부림은 쉬이 상생과 화합이란 명분으로 치장하곤 하죠. 그건 여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절박함은 쉬이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노래로 칼을 세우고, 그 칼을 가지고 바람을 재우는 법을 아는 것이겠죠. 모든 사람이 강물이 되고 별이 되고 꽃이 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