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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23 멸봉공사의 미덕 : “당신의 문화정책은 무엇입니까?” - 고영직 by 망명객

신예작가 박주영의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민음사, 2006)에는 책에 미친 '백조’가 등장한다. 이 여성화자에게 책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다. 예컨대 “누군가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듯 나는 책을 믿는다”라는 진술을 보라.‘책=예수=부처’라는 등식이 성립 가능하다. 책에 미친 바보인 이 여성화자의 꿈이 남들과 똑같은 인생 목표 따위를 상정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그녀는 돈과 입신출세立身出世의 성공 신화가 지배하는 세상의 논리로부터 이탈해 ‘역주행’의 상상력을 마음껏 구가하고자 한다. 즉 ‘나’의 개성과 취향을 더 중시하는 삶의 윤리학을 추구하고 그러한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백수생활백서』에 등장하는 여성화자가 추구하는 삶의 지향성을 이른바 ‘멸공봉사滅公奉私’의 윤리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오늘의 현실에서 소위 멸사봉공이라는 가치관은 시대착오적이다. 적어도 지금 우리 사회는 전 사회적으로 ‘국민총화’의 이념을 독촉 받는 시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전)근대적 노동사회의 패러다임을 넘어 탈노동사회의 문화적 비전이 중요해진 시대를 맞은 것이다. 저마다 개인의 문화권리와 다양한 욕구가 실현되는 문화사회의 비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일이 퍽 중요해졌다. 문화사회의 비전이란 결국 민족과 국가 그리고 인종과 종교 따위의 어떤 하나의 ‘소속’이 절대적으로 나와 우리의 정체성 본질을 형성했던 전前 시대의 자명한 가치관들과 결별하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의 박주영 소설의 화자처럼, 이제는 나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다양한 가치들의 ‘배합’에 대한 사유가 더 중요해졌다. 나와 우리의 인격을 구성하는 정체성은 특정한 이념이 아니라, 취향과 언어 그리고 생활방식과 같은 개별적 가치들이 존중되는 사회의 윤리학을 학습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자율사회의 오래된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멸공봉사’의 이념과 윤리학은 충분히 논의되지는 못했다. 예컨대 참살이(well-being) 논의는 ‘나’(와 가족)의 이기적 욕망과 자본의 덫에 어느 순간에 포섭되고 말았다. 참살이 소동 탓일까. 등산 인구는 급증했지만, 우리의 행락문화는 여전히 속전속결식 ‘먹고 놀자’ 식의 놀이 관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세계 최고봉을 정복했다는 식의 자연에 대한 ‘정복 신화’는 권장되고 유포되지만, ‘인생 이모작’ 시대를 사는 공생共生의 윤리학에 관한 담론 생산은 초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2020년이면 ‘역동적인 대한민국’이 아니라 ‘죽어가는 대한민국(Dying Korea)’이 될 것이라는 우울한 진단 또한 제출되고 있다.

문화중심사회는 무엇보다 개인의 창의력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그 실현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개인의 문화 역량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의 문화적 의미생산을 위축시키는 정책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예컨대 지난 10월 20일,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예술인을 위한 역점 추진과제>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예술 현장의 ‘자율성’을 위축시키는 것 아니냐는 현장의 우려를 낳고 있다. 예술인 정책 강화, 창작 기반 조성, 자생력 제고, 산업적 발전, 향유 여건 개선 및 수요 진작, 예술 소통 체계 구축 등 6대 정책 방향과 28개의 추진 과제를 포함한 문화부의 <예술인을 위한 역점 추진과제>가 문화부의 정책성 사업들을 다수 포함했다는 점은 한편으로 이해되는 바 없지않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정책의 실현이 정부 차원에서 (재)기업문화마케팅센터, (재)디자인문화진흥원, (재)한국미술문화진흥재단, (가칭)예술산업발전위원회 등의 공식 기구를 ‘신설’해 주도적으로 실현하겠다는 정책의지의 표명에 이르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시스템 만능주의적 사고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정책 마인드는 무엇보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 할 민간 영역을 사유가 실종된 ‘수동적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지 않다. 이를테면 ‘인문학 위기’ 선언에 참여한 인문학자들이 (가칭)인문학진흥원 같은 기구 신설을 요구한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희섭 한국문화정책연구소장이 문화부 정책에 대해 “예술에 대한 정부의 정책 방향은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역량의 활성화 지원이어야 한다”라고 비판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터이다.

문제는 결국 시민들의 자발적 문화 역량을 활성화할 수 있는 사회적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될 터이다. 그리하여 ‘나의 문화정책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묻고 질문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정책에 대한 발상 자체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문화정책이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만이 독점적으로 만들 수 있는 천부天賦의 ‘특별 제조권’을 부여받은 것도 아니며, 그러한 기관에서 생산한 문화정책이 항상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멋진 비전’을 담아낸 것 또한 결코 아니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지난 문화정책의 역사가 스스로 증명하고 있지않은가. 오히려 국가의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적인 것 혹은 민족적인 것의 ‘홍보’를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인식되고 활용되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예컨대 ‘국풍80’과 같은 정책 사례들이 우리의 민족문화유산을 어떻게 왜곡하고 훼손했는지 우리는 자명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선출된 대표-전문가’의 협치 관계에 의해 생산되는 문화정책이 어느 면에서 이미 결정된 사안을 적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정책적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요즘 지식인들이 거버넌스라는 이름으로 국가쪽으로 빌붙은 것 아니냐?”고 힐난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슬로건에 담긴 가치의 힘을 신뢰한다. 그러나 전폭적인 지지 표명에는 입장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의미 있는 ‘소음’을 일으키는 예술 사례가 많은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하고 있고, 만일 그러한 ‘예술’이 출현했을 때 그 재미와 의미를 기꺼이 향유하면서 미적 자극을 받는 향수자층 또한 결코 두터운 것 같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늘의 문학장에 출현한 아마추어리즘과 트리비얼trivial화 경향의 심화 현상은 나의 이러한 비관주의적 입장을 강화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물론 엘리티즘 문화예술 옹호론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술적 소통’에 대한 믿음이 그 어느 때보다 위협 받고 있는 오늘의 예술 현실에 대한 생산적 논쟁이 제기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할 따름이다. 다양한 가치들에 대한 인정과 존중도 필요하지만, 그 다양한 가치들간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명한 전제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의 기반은 필연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 문화예술의 현실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말처럼, ‘호모 심비우스’(공생인간, Homo symbious)적 존재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라도예술적 소통에 관한 논의는 더욱 요구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우리 사회가 문화중심사회의 비전을 모색하려면 저마다 스스로 ‘나의 문화정책’을 수립하고 자발적으로 그 정책적 목표를 추진하려는 노력이 요청된다. 문화정책에 관한 한, 오직 공기관이 그것을 수립하고 추진해야 한다는 관념 따위는 그릇된 편견에 불과하다. 왜 ‘나의 정책’이 필요한가? 그것은 나와 우리의 삶이 어느 순간 ‘게토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탈노동사회의 가치 척도는 다른 무엇보다 창의력이 중시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나의 문화정책’은 이른바 근면 가치만을 일방적으로 요구했던 저 1970년대식 생활계획표 작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자발적 문화백수로 사는 재미와 가치를 내면화하는 삶의 윤리학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으리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 홀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벗들과 술잔을 나누는 행위는 또한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러한 자발적 문화행위 속에서 나의 꿈은 더 이상 잠재성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외화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당신의 문화정책은 무엇인가?

 

고영직|문학평론가. 196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992년 『한길문학』을 통해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자발적 가난’의 한 경로」와 「한국문학과 베트남전쟁」 등이 있다. 현재 본지 전문위원이다  

 

출처 : 기전문화예술 2006 11·12, vol.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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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높은 파고 속에 실력이 경쟁력이자 상대에 대한 매너로 통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물론 일을 잘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칭찬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정보화 기기의 발달에 따른 속도의 사회 속에서 개인적인 가치 추구란 사적 영역은 공적 영역에 의해 침범당하기 일쑤.

 

어차피 노동만을 팔고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멸공봉사의 길은 멀고도 험한 이상향의 목소리로만 들린다. 하지만 정작 추구해야 할 이상향임은 분명하다.

 

직접 글이 담긴 페이지에 포스트잇으로 표시 후 보내주신 고영직 선배에게 감사드리며 멸공봉사의 삶에 대한 이론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선배의 책 출간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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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