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8.03 가슴 속에 술병 하나 고이 담아두며 by 망명객
  2. 2008.04.17 미시적 삶 4 by 망명객
잘린 나무 등걸과 KHS

한마당을 지키던 고목이 잘려나갔다. 주변엔 안내 문구 하나 없었다. 교문 옆을 지키던 고목처럼 이 녀석도 조만간 새로운 녀석으로 대체될까? 캠퍼스엔 해가 멀다 하고 새 건물이 들어선다. 건물보단 나무나 벤치를 랜드마크로 삼던 기억이 내겐 더 많은데 말이다. 교육기관이라 인재 육성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인재들의 기억에 각인된 추억의 나무까진 채 신경쓰지 못하는 학교. 참 씁쓸한 일이다.

2년 전 술자리에서 처음 만나 2년 동안 죽어라 술자리를 함께 했던 친구가 내일모레 미국으로 떠난다. 2년이란 시간 동안 동고동락했던 도반이 떠난다니 시린이처럼 가슴 한 켠이 아리다. 이것으로 꼭 함께 졸업하자던 다짐은 술자리의 허언으로 끝나고 말았다. 과정으로서의 학위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찌 삶까지 그러하랴.

인사차 찾아간 노교수는 친구에게 "배고플 때 스테이크 하나 사먹어라"라며 100달러 지폐 한 장 쥐어주더란다.  "꼭 배고플 때 사먹어야해"라며 노교수가 강조했단다. 떠나는 이에게 밥 한 끼 먹이는 일이 내가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인사치레였다. 학교 구내식당에서 2500원짜리 식권 두 장으로 우린 함께 메밀소바를 나눠먹었다.

출국 준비로 바쁜 걸 알면서도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를 술 한잔 나누지 않고 보내려니 섭섭함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술병 하나 가슴 속에 킵해둬."

친구의 한마디에 아쉬움이 한가득이다. 지하철 입구에서 두 남자가 시덥지 않은 이야길 나누며 미적거리고 있었다. 연거푸 담배 두 가치가 꽁초로 변할 시간 동안 말이다.

"한국 돌아와서 뿌리 내릴 생각일랑 죽어도 하지 마."

지하철 입구에서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긴 이것밖에 없었다. 뒤늦게 공부에서 재능을 발휘해 4년만에 모든 학위를 마친다면 어떨까, 하는 우스갯소리에 대한 내 응답이었다. 아쉬운 포옹이 이어졌고 우린 각자의 갈 길로 방향을 틀었다. 녀석의 뒷모습을 내 기억 속에 담아두기 싫었다.

친구에겐 대학원에서 보낸 2년이란 시간이 한마당 고목처럼 등걸로만 남았다. 이제 곧 녀석은 그 등걸 위에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이다. 더 넓은 세상에서... 네 말처럼 각자의 가슴 속에 술병 하나 고이 담아두자꾸나. 우정이란 이름의 술병 말이다. 고맙다. 미안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KHS.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녀석이 "형, 늙은이 티 내는 거 아니에요?"라며 유쾌한 미소를 날릴 것 같다. 그래도 어쩌랴. 요즘 내 감성 상태가 이런 것을... 태평양 너머로 유학을 떠난다지만 우린 곧 메신저에서 이야길 나누겠지. "아직도 술쳐먹고 다녀?" "넌 아직도 쭉쭉빵빵 아가씨 지나가면 고개가 절로 돌아가냐?"처럼 시덥지 않은 이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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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

미시적 삶

카테고리 없음 : 2008. 4. 17. 01:06

학력 인플레이션 시대라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생 중 열의 일곱 정도가 대학을 진학하는 시대. 그들 중 다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석박사 과정생으로 대학원 진학을 한다. 진심으로 학문이 좋아 진학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자기 실력을 쌓으려 진학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요즘엔 업무의 연장으로 대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도 많다. 각종 특수대학원들이 저녁 과정을 열어두고 그러한 사회적 수요를 받아들이고 있다.


어릴 적 생각하던 박사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동네 어귀에 걸린 '누구네 집 몇 째 딸 아들 박사학위 취득'이란 문구의 현수막은 내게 박사에 대한 아우라를 키워주었다. 그런 아우라는 대학을 다니면서 깨졌다. 어차피 박사도 사람이라 걔들 중 일부는 고딩 때 씹어대던 학생주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다시 박사에 대한 옛 아우라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학문적으로 취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힘든 과정을 거치며 학위를 취득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존경심마저 깨져버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함께 뒷담화를 까대던 교수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박사과정생, 혹은 박사들. 그렇게 천둥벌거숭이마냥 잘난 인간들을 보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것을 혼잣말로 되뇌인다. 문제는 자기 혼자 살겠다고 후배를 사지로 내모는 인간들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거쳐간 사람이기에 선배라고 부를 터. 그런데 그들 중 자기가 당한 일을 후배에게 강요하는 인간들이 있다.  안타깝거나 미안한 일을 시킬 때, 그에 상응하는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던져주는 게 인간사의 도리다. 하다못해 술 한잔, 밥 한끼라도 사주는 게 선배의 도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의 등에 칼을 꽂는 인간들이 있다.


어차피 널린 게 석사고 채이는 게 박사인 세상이다. 대충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세상 아니던가. 다시 파이터의 기질이 되살아난다. 어느 프렌드처럼 피지컬한 파이터 말고, 피곤하니 그저 세치 혓바닥으로도 충분한 파이터 말이다. "난 네가 학석사 시절에 한 짓을 알고 있다"는 류의 치졸한 화살촉을 지닌 혓바닥말이다. 선배? 박사가 되고 선배가 되기 전에 인간부터 되어야 도리다. 개와의 싸움은 개답게 싸워줘야 제맛일 터. 다시 혓바닥이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미시적인 일에 천착하는 삶은 피곤하다. 존경하는 선배는 그런 기억들을 지녀봤자 내 손해라며 한잔 술에 잊으라 한다. 그렇다고 개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복수의 기회는 단 한 차례라고 했던가. 그렇게 복수의 날을 기다리며 날을 벼릴만한 깜도 아닌 것에 난 이리도 분노한다.

Posted by 망명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