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얼굴 빨개지는 아이"였다. 특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시기에는 급격히 빨개진 얼굴을 가리려 고개를
푹 숙이곤 했던, 그런 사람 말이다. 평상시 그의 하얀 얼굴은 빨간 얼굴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으니, 그는 그렇게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공간을 지키고 있던 나는 그의 하얀 얼굴과 빨간 얼굴뿐만 아니라 보라빛 얼굴도 기억한다. 강촌의 어느
민박집, 물러나는 전직 학회장으로 칠배주를 한꺼번에 들이킨 그는 그 고통을 고스란이 보라색 낯빛으로 표현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춘천역 근방의 닭갈비집에서 그 어느 때보다 하얀, 그래서 더욱 창백해보였던 그는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나와 내 동기
녀석은 차려진 닭갈비로 열심히 배를 채우고 있었다. 차려진 음식을 몇 점 먹어보지도 못한 그가 계산을 마쳤고, 나와 내 동기의
손에는 서울행 교통비가 쥐어졌다. 그때 우리는 모두 말이 없었다. 아마 몇 마디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기억나는 건
침묵뿐이다. 춘천102보충대, 몇 마디의 인사를 나누고 창백한 그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나와 내 동기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입대와 제대 그리고 복학을 거치는 동안 나도 그를 따라 입대와 제대, 복학을 거쳤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린 같은 공간에서 부딪기며 살아갔다. 역시 입대와 제대, 복학을 거친 여러 친구들과 함께.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듯 싶었지만, 다들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물론 이야기의 중심에는 연애와 스포츠, 술과 오락이
여전했지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새로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쉬이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럴 만한
상황에서는 유연한 농담으로 되받아치는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모두들 쌍시옷의 육두문자를 입가의 미소와 함께 올릴 수 있는
자연스러움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준비과정을 거쳐 하나둘 학교를 떠났다. 함께 가는 사람은 없었다. 각자의 길은 각자가 걸어가야
할 몫이니까.
각자의 길을 걷더라도 삶의 주요 고비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굴이 빨개지던 그도 평생의 동지를 만나 내게는 낯선,
그에게도 처음에는 낯설었던 그 고장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의 삶의 늘 행복으로 가득하길 빌어주는 마음, 그 마음 만으로도
함께했던 우리는 여전히 철없이 떠들고 놀던 예전의 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