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스물 아홉에 이등병이 될 친구를 위한 술자리는 박상우 소설 속의 술자리처럼 정치가 빠져있었다.

과거완료형 기억 속 얼굴들이 마주한 탁자 위에는 슬금슬금 기어가는 기억의 끝으로 현재진형형인 이야기가 흐르고 잔이 채워지고 비워지는 횟수만큼 우리의 나이는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렇게 가벼워진 우리들의 대화, 그 심연 속에는 차마 늘어나는 빈 술병의 무게에 눌려 퍼올리지 못한 몇 마디의 이야기가 부유하고 있었다.

'미안해', '수고했어', '고마워'

몇 차에 걸친 술자리가 끝나고 얼마 남지 않은 일행은 또 다음 차를 향해 골목을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진 녹두거리에는 김춘수의 싯구처럼 3월의 눈이 내렸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2005년 3월 3일, KYJ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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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명객